초등, 중등, 고등부 대상 수상작
<초등대상>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
6학년 2반 손한나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요즘 푸른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이 외침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나라를 위해 열심히 뛰는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면 우리 몸속엔 짜릿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이 흐릅니다. 이 외침은 온 국민들의 바람이며 기쁨입니다. 일제시대에도 조국 독립을 위해 그들의 칼날 앞에서 대한 독립을 외치며 그 소리가 하늘로, 하늘로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이 곳 상해에서 목숨을 바치신 윤봉길 의사가 생각납니다.
1908년, 충남에서 태어나신 윤봉길 의사는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3.1독립운동에 자극 받아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보통학교를 자퇴, 최병대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셨습니다. 12살이면 나와 비슷할 텐데 독립운동에 자극 받아 학교를 자퇴하셨으니 정말 어릴 적부터 애국자였던 것 같습니다.
1919년에는 <<장부출가생불환>>이라는 글을 남기시고 중국으로 떠나셨는데, 정말 각오가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1932년 상해 홍구공원의거-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의 시라카와 대장 이하 중국 침략의 군관민 수괴들을 응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총살형으로 순국하셨습니다.
전 그저 윤봉길 의사께서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떠나신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마 1945년 우리나라가 광복을 하였을 때, 저 하늘에서 감격의 눈물과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태극기를 흔드셨을 것입니다.
윤봉길의사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가들과 국민에게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하게 된 것은 국민과 나라가 함께 노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나 IMF위기와 같이 닥쳐 온 우리나라의 위기를 국민들이 마음을 모아 헤쳐 나온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 항상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라도 우리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서로 "나 아니여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가 아닌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위기를 헤쳐 나가자*하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그 속의 힘과 애국심만큼은 정말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전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나라를 사랑하고 위하면, 대한민국은 모두가 살기 좋게 될 것입니다. 2002월드컵과 같이 뜨거운 열기로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중등부 대상>
폭탄에 든 용기
8학년 1반 이승현
`그대의 용기가 대한민국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요.'
아마도 윤봉길 의사를 보내는 김구 선생님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아니 사실일 것입니다. 그분의 폭탄이 대한민국의 독립으로 남아있으니까요. 우린 가슴 깊게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느껴봐야 합니다.
고전수필 `슬견설'이란 이야기는 살아있는 것은 다 살고 싶어 한다고 말해 줍니다. 그런데 과연 윤봉길 의사께서는 살기가 싫으셨을까요? 아닐 겁니다. 그분도 살고 싶으셨을 겁니다. 그냥 평범한 부모로 아이들과 즐겁게 살아가면서.......그분의 목숨은 살아있는 우리 눈에는 하찮은 목숨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분처럼 죽을 것을 다 아는 장소로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갈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을 존경합니다.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도 바칠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군인들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는 거란다.'
제가 예전에 도덕 시간에 들은 내용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선생님은 과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윤봉길 의사께서는 쉴 새 없이 제게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세계에서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보다 모두를 위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곧 윤봉길 의사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몸소 가르쳐준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국가를 위해, 모두의 미래를 위하신 윤봉길 의사! 그분께서 던지신 그 도시락 폭탄 속에는 김구 선생님의 독립 염원과 윤봉길 의사의 용기와 우리 전 국민의 자유가 담겨있을 것입니다.
우린 해마다 조국 선열의 날을 보냅니다. 그때마다 국가 모두를 위해, 아니면 자기 가정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지 모두를 위해 돌아가신 윤봉길 의사를 생각하며 지내야겠습니다.
<고등부 대상>
그가 서있던 자리에 서 보며
12학년 1반 한혜정
"혜정아, 좀 일어나 봐라.* 토요일 아침, 늦게까지 잘 생각이었던 나는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눈을 떴다. 아직 학원 갈 시간까지는 세 시간이나 남았는데 엄마는 나를 너무 일찍 깨우셨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에 함께 다녀오자고 하시는 것이었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선 학원이 걱정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중국에 3년을 살면서 그 동안 마음만 있었지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기에 결국엔 나도 엄마를 따라 같이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도 가는데 꽤 멀었던 노신공원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주소도 없이 무작정 찾아 간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중국의 노신 기념관이 그곳인 줄 알고 잘못 들어가기도 했다.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우리가 찾던 그곳이 아니란 걸 알았지만. 결국 그 곳을 나와서 근처에 서있던 경비 아저씨에게 한국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 위치를 물었고, 덕분에 그 뒤로는 제대로 찾아 갈 수 있었다. 의외로 거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의사의 기념관이 있었다.
처음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에 들어섰을 때, 처음 그의 독사진과 도시락 폭탄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약 74년 전에 실제로 그가 서 있었을 바로 그 자리에 섰을 때, 뭔지 모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상상만으로도 덩달아 긴장된 내 심장소리였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땐 그저 그가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직전에 내뱉었을 초조한 숨소리가 귀 가까이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순박하기만 했던 한 청년이 농촌에서 농민 계몽 운동을 펼치다 도대체 어떤 비장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다 제쳐두고 중국에 와서 그 큰일을 했을까. 사진 속에서의 그의 눈빛은 너무나 소박하고 순수하기만 해 보였다. 당시 그가 폭탄을 던지러 가기 직전 차 안에서 김구 선생께 주었다는 손목시계를 보았을 때, 이미 그는 차에서 내린 후의 그에게 시간이란 얼마 못 가 멈출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 그랬다면, 어떻게 그런 막막한 생각을 하고서도 남들을 다 속일 정도의 태연한 모습으로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중국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도시락 폭탄 사건으로 현장에서 붙잡힌 그는 그 해 12월 일본에서 일본 순사들에 의해 두 눈이 가려지고 두 팔이 묶이고, 두 무릎이 꿇린 채로 굴욕 속에 총살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고작 25세, 죽기엔 너무나 이른 나이였음에도 그는 그렇게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하늘로 갔다.
열아홉의 나도 이제 일년 후면 스무 살이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난 월드컵 때 응원만 열심히 했지, 정작 나라를 위해선 별로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기념관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서도 내내 드는 부끄러운 마음은 계속해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규모로선 노신보다 작았던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은 나에게 노신 기념관에서 받았던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많은 감동과 교훈을 주었다. 만약 그 날 아침 엄마의 제안을 거절하고 평소대로 학원에 갔었더라면 많이 후회했을 뻔 했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 아닌 마음으로 배우고 느낀 역사는 그것만으로써 그 날의 충분한 값어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