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u’s Tour Essay 1st]
물의 길 水之路
신장(新疆)이라고 줄여 부르는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维吾尔自治区)는 먼 땅이다. 알려진 것도 많지 않다. 아마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신장의 모습은 실크로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신장은 그 면적이 166만㎡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다. 중국 전체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맞대고 있는 국경선의 길이만 5600km에 이른다. 신장을 와보지 않고 중국의 거대함을 알 수 없다는 말도 있다. 면적의 넓이만큼 역사의 깊이 또한 만만치 않다.
최근의 연구는 이 땅에 인류가 존재한 것이 6천 년 이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넓고 오랜 땅에 겨우 실크로드 밖에 없을 리가 없잖은가.
이번 글은 2013년 6월 2일~6월 9일, 8월 14일~8월 17일 두 번에 걸쳐 12일 동안 다녀온 기록이다. 그들의 말을 다 듣지 못했고, 충분히 묻지도 못했다. 60여 년에 걸쳐 개척한 땅에서 고작 열흘 남짓 머물렀으니 시간 또한 모자른다. 이 넓고 깊은 땅을 작은 시간의 관찰만으로 이야기를 엮어낸다는 것이 못내 서툴고 부끄러운 작업 같아서 시원찮은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겨우 옮겨 적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궁금해하고, 그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되면 좋겠다.
물의 길 水之路
아침 빛은 맑고 강했다. 아침 9시를 넘겨 숙소를 나섰다. 9시라고 해도 이곳은 베이징에 비하면 해 뜨는 시각이 두 시간 이상 늦어서 빛은 아직 새벽이다. 여기는 대도시와 다른 빛이 내리는 땅이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땅으로 바로 쏟아지는 변경의 빛은 경계가 뚜렷한 그림자를 만든다. 도로변 잔디밭 위로는 스프링쿨러가 쉴새 없이 물을 뿌려대고 있다. 흩뿌리는 분수가 작은 무지개를 만드는 장면은 신장 지역의 도시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아침 풍경이다.
불모의 땅에 초록의 풀들을 옮겨오기 위한 노력들이다. 그 초록에 기대어 사람들이 마을을 만들고 산다.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녹지 아래에는 물관이 지나고 있다. 저 물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정의 첫 목적지는 이 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일행은 우루무치에서 남서쪽으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1호 빙촨’으로 차를 타고 간다. ‘빙촨’은 빙하의 중국 이름이다. 흐르는(川) 얼음(冰)이다.
시내를 벗어나면 풍경은 비로소 그 땅이 가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시내를 벗어나자 마자 빌딩이 사라진 자리를 황토의 벌판과 봉우리가 채운다. 우루무치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신장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황막함이다. 풀 한 포기 없는 산이 이어진다. 바람이라도 불면 자욱한 황토 먼지가 산을 통째로 옮겨 가버릴 것 같다. 이 거대한 황토를 초록으로 바꾸는 물은 얼마나 거대한 힘일까?
30분쯤 달렸을까? 멀리로 눈 덮힌 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지를 지난 차는 설산의 산맥을 관통했다. 산맥 너머로 다시 얼마간의 평지를 달린 자동차는 이내 깔끔한 포장도로를 버리고 비포장 오르막 길로 접어들었다. 협곡의 허리쯤으로 난 길은 천천히 고도를 높였다. 길 옆으로 협곡은 가팔랐고 좁은 길에 대형 트럭들이 줄지어 오갔다.
많은 사람들이 빙촨을 보러 오면 혹시나 상수원이 오염될까 걱정하는 정부는 현재 빙촨을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계획이 없다. 그래서 빙촨으로 이어지는 길은 거칠고, 당분간은 계속 이럴 것이다. 거친 길의 주인은 양떼들이다. 소수민족 소년 목동은 익숙한 동작으로 양떼를 몰았다. 자동차는 익숙한 일인 듯, 양떼를 재촉하지 않는다. 중간에 몇 번씩 길이 헷갈릴 때는 차에서 내려 계곡을 흐르는 물을 살폈다. 빙촨으로 가는 길은 빙촨에서 시작한 물의 길을 거슬러 가는 여정이다. 물의 길이 사람의 길을 안내한다. 저 물을 따라 가자. 거기에 빙촨이 있다.
본격적으로 비포장 길로 들어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대로 계속 길을 따라 가면 …에 닿는다. 차도로 올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빙촨이 있다고 말하는 방향을 바라보니 길은 산 비탈을 갈 지자로 기어오르고 있다. 산판길이다. 대충 흙을 다지고 주변의 돌들을 끓어모아 덮었다. 큰 눈이라도 온다면, 비라도 며칠 내려 흙탕길로 변하면 도저히 차가 오를 수 없는 길이다. 앞서 도착한 승용차 한 대는 왔던 길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바닥이 낮은 승용차로는 가기 어려운 길이다. 길의 입구는 어설픈 바리케이트로 막혀 있다. 그곳 입구를 지키는 민간인에게 통행료 얼마를 건네 주고 길을 열었다. 흙과 바위로 덮힌 길을 조심스럽게 20분쯤 올랐다. 먼 곳에서 빙촨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물의 길이 시작되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곧장 빙촨이 보이는 언덕 위에 섰다. 희다. 웅장한 흰색이다. 범접하기 힘든 전설의 고래같은 색이다. 빙촨은 아주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온 듯, 여전히 여정의 가운데 있는 듯했다. 다가갈 수 없는 거대한 산 앞에서 어쩌면 장어와 코끼리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의 죽음은 비밀에 싸여 있다고 한다. 장어는 바다에서 태어나 강으로 와서 살고 다시 어느 멀고 깊은 바다로 가서 죽는다고 한다. 코끼리는 죽을 때가 되면 무리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를 따로 찾아간다고 한다. 장어의 깊은 바다나 코끼리의 무덤은 어쩌면 저 설산과 닮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앞두고 일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목숨을 걸고 설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은 아닐까?
빙촨으로 다가가기로 했다. 미리 준비한 두꺼운 외투를 겹쳐입고 빙촨을 향해 걸었다. 4000미터에 가까운 고산 지역이라 조금만 걸어도 호흡이 가파왔고 속도를 더하려고 들면 머리 속은 멍해지고 걸음이 비틀거렸다. 길은 온통 바윗길이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깨진 크고 작은 돌들이 저들끼리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다. 바위는 편편히 갈라져 위태롭게 걸쳐있다. 붉은 돌들이다. 이 거친 바위들은 저 부드러운 얼음이 깬 것이다.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사 만 팔 천년을 깨어져 흘러내린 돌이다. 빙촨 사이를 흐르는 작은 시내가 보였다. 물줄기는 가늘어서 끊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바위 틈에서 솟아 오르기도 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 작은 물줄기가 이 황막한 신장을 채우는 물의 시작이다. 이 물이 아래로 가면 우루무치강乌鲁木齐河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신장 지역은 물이 풍부한 곳은 아니다. 이 땅의 녹색은 대부분 사방의 산맥에서 시작한 빙촨의 물에 기대고 있다.
빙촨의 첫인상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크림 덩어리 같다. 제 때 먹지 않아 녹아내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그 인상은 완전히 다르다. 거대한 빙촨의 수직 전면은 거칠고 과감하다. 열을 맞춰 진군하는 부대의 선봉 같다. 벽에는 작은 돌이 잔뜩 박혀 있다. 얼음은 전진하며 바닥에 있는 돌이 떠밀려 올리고 바람은 계곡의 작은 돌맹이를 이 벽으로 날려보낸다.
빙촨 위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빙촨의 정면은 절벽처럼 일어서 있어서 아무런 장비 없이 올라서기는 어렵다. 그래서 일행은 빙촨의 측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음과 바위가 만나는 지점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이 녹은 시린 물에 발을 담글 수는 없으니 그나마 얼음이 덮힌 곳을 찾았는데, 얼음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고, 발이라도 잘 못 디디면 곧장 얼음이 무너져 내리며 빠질 것이었다. 물길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고, 혹시 얼음 아래로 흐르는 급류에 몸이라도 빠진다면 도대체 어디로 실려갈지, 지상으로 다시 돌아올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안전해 보이는 곳을 골라서 돌을 던져보기도 하고 막대기를 꽂아보기도 하면서 얼음을 시험하며 겨우 빙촨에 오른다. 발이 빠진다. 얼른 걸음을 옮기며 얼음 덩어리 위에 올라섰다. 멀리에서 보면 거대해 보였던 빙촨은 막상 그 위에 올라서니 크기를 알 수 없는 평원으로 변했다. 양쪽은 계곡에 갖혀 있었고 아래로는 얼음 절벽이, 위로는 안개에 가린 뿌연 언덕이었다. 이미 여러 사람이 다녀 갔던 듯, 그들이 사용한 쇠막대기 몇 개가 보였다. 발자국은 찾을 수 없었다. 새 세상처럼 하얗고 무엇도 없는 눈의 벌판이었다. 멀리서 눈사태 소리가 났다. 거대하고 오랜 소리였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중간 중간 박혀 있는 돌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어디로 가겠다거나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 없이 그저 보이지 않는 위를 향해 더 걸었다. 더 이상 돌맹이 하나 없는 끝까지 와서 더는 올라갈 수 없었다.
한 여름의 새벽에서 겨울로 뛰어들어 몇 시간을 보내고 나니 모두 녹초가 되었다. 산 아래 현지인이 사는 파오에서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겉에서 보면 천 몇 겹을 둘러쳐 둔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니 포근함이 밀려왔다. 바닥은 흙바닥을 그대로 쓰고 있었고 가운데는 요리용 화덕을 겸한 난로가 놓여 있었다. 연통은 천장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원형의 천장 꼭대기에는 빛을 받아들이고 공기를 순환시킬 수 있도록 작은 구멍을 내어놓았다. 우리는 양고기 수육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면 할머니는 칼과 도마를 들고 바깥으로 나가 길가에 걸어둔 양고기를 직접 썰어낸다. 한여름인데도 이곳의 기온은 충분히 낮아서 따로 냉장고가 필요 없다. 물을 끓이고 양을 익히는 작업이 바로 눈앞 난로에서 이루어 진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물을 것도 없다. 양고기는 눈앞에서 익어간다.
양념이랄 것도 없었다. 끓는 물에 삶아낸 양고기가 양파와 함께 상에 올랐다. 양고기를 우려 낸 국물도 작은 그릇마다 담겨서 함께 올랐다. 손으로 뜯어내고 손으로 집어 먹는다. 신선한 양고기는 양고기 특유의 맛은 있었지만 비리지 않았다. 양고기와 양파의 궁합이 이토록 환상적인지 이곳에서 비로소 알았다. 신장 지역에서 양고기를 먹을 때는 양파를 함께 낸다. 양파는 양고기의 비린 맛을 없애고 혈압을 낮춘다.
다라하 할머니는 양을 유목하는 전형적인 하사커 족이다. 이 집에 대해서, 여기 생활에 대해 물었지만 수줍은 할머니는 좀처럼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고 눈도 잘 마추지지 않는다. 살짝 옆으로 몸을 돌리고 혼자말하듯 대화한다. 옆 파오에 사는 딸이 오고 나서야 우리 일행을 딸에게 소개하느라 말이 바빠진다.
“여기는 여름에 양을 키우는 목초지라네. 6월에서 9월까지 여기에서 양을 먹이고 겨울에는 내려 간다네. 이 집은 오래됐다네. 90년대 후반쯤에 지었으니 20년 가까운 집이지. 나는 여기에서 머무는 여름을 좋아한다네. 사실 여름에는 양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아. 우리는 주로 겨울에 양고기를 많이 먹는데, 여름이면 한 식구가 한 마리로 두어 달도 먹어. 대신 여름에는 주로 낭, 나이차를 먹어. 밥도 먹지. 아, 밖에 걸어둔 거? 손님이 오면 팔아야지! 그건 손님 주려고 해둔 거야. 요즘에는 양 1킬로그램에 120위엔을 받는다네. 양고기는 1킬로그램에 120위엔이다.”
한참 양고기와 양파를 번갈아 씹고 있는데 듬직한 청년 하나가 들어와서는 스스로를 할머니의 큰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카나트는 7월에 두 번째 결혼을 한다고 한다. 영어도 곧 잘 해서 하사커족의 결혼 풍습을 묻는 나에게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설명을 풀어댄다. 넉살좋은 친구다. 말은 머뭇거림이 없고 몇 마디 농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다. 다만 사진을 찍지 말라고 당부했다.
카나트는 한국에 대한 인상이 좋다. 작년 여자친구 집에 인사갔을 때 장인어른이 당부한 것도 있다. 장인어른은 한국드라마를 즐겨보는데 특히 드라마에서 보이는 노인 공경 문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른의 말은 결혼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는데, 아직 카자흐스탄에서는 신랑 신부가 서로의 부모를 통해 배우자를 소개받고, 그 뜻에 따라 결혼하는 것이 전통이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그의 개인적인 기억도 있다. 파오 바깥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젠가 김정민이라는 한국인이 자전거로 저 언덕을 넘어왔다. 강하고 멋진 친구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차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아주 멀리서 왔다고 했다. 그가 내게 남긴 인상이 크다. 내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주는 느낌은, 나라는 작고 슬픈 역사를 가졌지만 좋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결혼한다니 축하해요?
축하는 무슨, 이게 무슨 축하받을 일이오?
아니, 왜요?
정말 멋진 남자라면 결혼같은 건 하지 말아야지요!
유쾌함이 가득하다 못해 넘치는 친구다. 함께 양고기 국물을 마시며 우리는 가까워졌다. 제법 여러 이야기가 오간 뒤에 거듭되는 질문과 받아쓰는 자세를 본 후 카나트는 조금 진지해졌다. 농담 같은 건 통하지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까?
다시 두 번째 결혼에 대해 물었을 때, 카나트는 사실 이제까지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다라하 아주머니의 큰아들도 아니고, 4살 된 아들도 없다. 많은 이방인이 지나가는 길의 가운데에서 그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대처해 온 듯했다. 사진에 대한 거부감도 마찬가지였다.
채집당하듯 자신의 얼굴이 담기는 것이 싫은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물론 두 번째 부인을 얻는다는 것도 거짓말이고 처음 하는 진짜 결혼이다. 실제 카나트의 아내가 될 사람은 경찰이다. 아내는 총을 갖고 있고, 사격 점수도 높으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며 크게 웃는다.
카나트가 들려주는 하사커 족의 결혼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우선 첫 번째 과정은 관할 관청에 가서 결혼 등록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몰다라고 부르는 종교적 지도자 앞에서 결혼을 공인받는 것이 두 번째 과정이다. 세번째는 본격적인 결혼 파티다.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맞는 것은 중국 결혼 풍습과 닮았다. 신랑이 신부를 파티장으로 데려온 후 신부의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들어올리면 이것을 신호로 축제가 막을 올린다. 보통 10명도 넘는 친구들이 함께 노래부르며 축하하고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자잘이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엄마는 결혼식에 갔다네.
아이는 혼자 남았고 엄마는 음식에 손대지 말라고 했지.
아이는 참지 못 했고 결혼식에 다녀온 엄마에게 혼이 난다네.
이런 내용이라고 한다. 조금 더 무서운(?) 노래도 있다.
‘새 가족이 된다’는 가사로 시작해서 1. 부모님께 잘하고 2. 형제에게 잘하고 등의 당부 반 협박 반의 가사가 10절까지 이어지는 노래도 부른다고 한다. 결혼식장에서 10절짜리 잔소리를 듣는 신부의 심정을 생각하니 괜히 나까지 막막해 졌다.
몸도 녹이고 배도 채운 일행이 파오를 나서자 카나트는 우리를 바로 옆에 있는 기상대 건물로 안내했다. 여기가 카나트가 일하는 곳이다. 빙촨의 변화와 주변의 기상을 관찰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일행은 그가 일하는 기상관측소에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사무실 벽에 걸린 다양한 도표와 사진은 지난 수 십년 동안 빙촨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1호 빙촨은 480만년 전에 처음 생겨났다. 만년설이라는 이름이 조금의 과장도 없는 셈이다. 가장 두꺼운 부분의 두께는 150미터 정도이다. 1년에 평균 5미터를 흘러내린다.
우선 놀라운 사실은 이곳에 있는 빙촨이 1호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산등성이를 넘어가며 빙촨은 6호까지 있었다. 1호 빙촨과 2호 빙촨은 본래 붙어 있었는데 본래 붙어 있었는데 1988~1993년 사이에 분리되었다. 빙촨이 녹으며 그 사이에 있던 산이 빙촨을 가른 것이다. 1962년에서 2006년 사이에 빙촨의 면적은 14퍼센트가 줄었다. 이곳에 있는 빙촨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1호라는 이름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다만 보이는 대로 이름붙이다 보니 1번이 된 것이다. 제일 앞줄에 선 아이처럼. 1호 빙촨을 제외한 나머지 빙촨은 나중에 숙소로 돌아온 후 위성지도를 통해 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신장 지역이 공업화한 1985년 이후 만년설의 고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만년설을 보기 위해서 점점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말이고, 아래쪽의 만년설이 점점 녹고 있다는 말이다. 현재는 약 4200미터 고도에서 만년설을 볼 수 있다. 현재 평균 기온은 영하 3도 정도인데, 85년 이후 약 0.3도가 오른 것이다.
그 사이에 10제곱 킬로미터 면적의 빙촨이 사라졌다. 0.3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온다는 표정을 읽은 것일까? 곧 카나트가 말을 덧붙인다. 세계 평균 기온이 0.5도 상승하면, 상하이는 물에 잠기고 만다고 한다. 이대로 간다면 더 이상 빙촨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수준이 된다고 말한다. 그냥 얼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위성지도를 살펴보면 그의 말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평원처럼 펼친 만년설은 없다. 눈봉우리는 한 걸음씩 물러나다가 더 도망갈 곳도 없어서 까치발로 겨우 서 있는 거인처럼 산봉우리 위에 겨우 남았다. 군림하는 얼음이 아니라 동물원의 맹수처럼 갇혀 버린 마지막 버티기도 오래 가지 못 할 것 같다.
빙촨의 기후 변화에 대해 말하는 카나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던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나타난 것 같다. 장난기는 쏙 빠지고 눈빛은 사명감으로 찬다. 그가 공부한 난징기상대학은 현대 중국의 대표적 지질학자였던 리스광李四光이 교장으로 있었던 중국 기상학의 명문 학교다. 카나트의 말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기상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약 5만 여명 수준이고, 이는 인구에 비해 결코 많은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연이어 사무실 안에 있는 계측 장비를 소개한다. 현재 기상자료에 관해서는 전 세계가 공유한다고 하는데, 이는 설사 서로가 전쟁중이라고 해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아시아의 기상자료는 1차로 일본 도쿄에 모인다고 한다.
기상대에서 설명을 다 듣고 우리는 설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뭐야, 같이 사진 찍어도 되는 거야?
그럼, 물론이지!
빙촨에서 흘려내린 물의 일부는 인공호수에 담긴다. 생활용수와 농업 용수로 쓸 물을 저장한 댐은 2000년 현재 타림 분지 내에만 76개가 있고 그 중에 26개가 빙퇀의 관할 하에 있다. 호수는 멀리 산이 보이는 곳에 있다. 8.1 호수를 안내한 돤나段那는 빙퇀 3세대다. 2005년부터 이곳에서 8.1 기념관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1949년에 허베이 성 涉县에서 이곳으로 와서 이 호수를 만드는 현장에서 일한 사람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10대였고, 군인이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는 그녀를 앉혀두고 호수를 만들 던 때의 고생담을 들려주고는 했다. 겨울이면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위 속에서 사람들은 토굴을 파고 살았고, 자고 일어나면 얼어서 굳은 얼굴 위로 흙 섞인 얼음이 떨어져 내렸다고 했다. 일 많이 하는 사람이 미덕이던 시대였다고 했다.
여자들은 생리 중에도 일을 쉬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 다들 몸에 병을 안고 산다고 했다. 그녀는 어려서 세대를 건너 뛰는 이야기는 다만 지루하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이제 80세가 넘었고, 들어보려고 해도 더 이상 전해듣기가 쉽지 않다. 할아버지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여기 108단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고향 땅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이제 신장인이다.
사람이 모아 만든 물에 새가 날고 배가 다닌다. 물은 아마 저 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계곡과 황토 땅을 지나고 숲을 살리며 왔다. 물의 길을 가두어서 다듬어서 이제부터 물이 가는 길은 사람이 만드는 길이다. 미리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이 거대한 호수를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책하고 사색하고 먹고 마시고 겨루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호수를 만드는 구나. 산을 바라보고 앉으면 해는 등뒤로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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