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상하이 20강 초청 작가
“시 쓰는 사람, 이정록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천안중앙고에서 한문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몇 분 애독자들에게 실망시켜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문학학생부군입니다. 아, 우리 아파트 반경 200미터 이내의 술집 아줌마 아저씨들은 저를 애주가협회 천안아산 지부장인줄 압니다.”
장난끼 많고 유쾌한 시인의 성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기소개다.
상하이저널과 함께 하는 책읽는 상하이 20강의 주인공, 이정록 시인을 서면으로 만났다. 그의 시를 읽을 때처럼 키득키득 웃음이 새어 나오다가도 어느새 묵직한 메시지가 가슴에 들어와 앉는다.
시를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 때문에 장녀인 누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라디오 뒤판에 납땜을 하는 동화전주식회사에 취직했죠. 월급을 받자마자 10권짜리 <한국여류수필문학> 전질을 샀는데 그때 보너스로 받은 <한용운의 명시>를 저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그걸 보며 시라는 것을 끼적거리고 훔쳐서 연애편지에 써먹으면서 자연스레 입문하게 되었죠. 저는 지금도 한국문학의 보너스나 부록 정도가 목표예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세계문학 속에 보너스가 되는 꿈도 갖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요.
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시는 ‘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줄이라면 빨랫줄도 떠올리고 전깃줄도 떠올리고 인연도 생각하실 텐데요, 시는 존재 사이에서 관계를 맺어주는 줄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을, 탄생과 소멸을, 존재와 존재 너머 이전과 이후를, 차가운 등짝과 따스한 가슴을, 카오스와 코스모스를, 관찰과 통찰을 이어주는 거죠. 떨림과 설렘을.
시상은 주로 언제 떠오르나요?
딱히 ‘어느 때’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詩想(시상)이란 것을 심장 펄떡거리는 생명체라고 여깁니다. 우주의 숨결로 살아 있다가 ‘저 시인이면 나를 잘 보듬겠구나.’ 싶을 때 시인의 가슴과 머리에 일순 쳐들어온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늘, 받아들일 준비를 합니다. 잘 때에도 노트와 펜을 베갯잇 속에 품고 잡니다. 받들어 모시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작가님을 소개할 땐 ‘위트’와 ‘낙천’이 수식어로 항상 따라붙는데요, 타고난 것인지요?
어린 시절 동네에 동갑네가 너댓 있었는데 좀 많이 치였죠. 충돌도 있고, 그러다가 아이들을 피해 조기입학했지요. 늘 두 살 많은 애들과 학교에 다녔어요. 당연 심사가 복잡했죠. 그러다 대학에 가니 내가 나이 어린 것을 잘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막 술 퍼먹으면서 떠들어 댔죠. 으스대다보니까 과장도 하게 되고, 남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꾸미기도 하고. 하여튼 갑자기 떠들썩해진 대학생활이 좋았어요. 그리고 우리 집안이 어려서부터 워낙 복잡한 가계거든요. 코미디언 치고 거의 유복한 출신이 없잖아요. 웃음 많은 놈일수록 속은 복잡하고 허하죠. 전 미꾸라지나 개구리처럼 흙탕물 치며 노는 걸 좋아합니다.
시라는 장르가 갈수록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분위기인데요, 시인이나 출판사는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까요?
선의의 경쟁이란 말이 온기를 잃으면 나만 경쟁하는 꼴이 되죠. 출판사란 것도 사람이 하는 일 아닌가요. 별 기대 없어요. 좋은 출판사라고 하는 데도 상업적인 시를 많이 출판하죠. 상업적이지 않은 시집도 상업적 이슈를 만들어 팔아먹죠. 그걸 서로 눈감아주죠. 상업적인 것이 나쁜가요? 아니에요. 부도덕한 속임수가 나쁜 것이죠. 자신이 펴내는 잡지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도덕성을 주장하며 뒤로는 호박씨를 깐다 말이죠.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그 호박씨가 되고 싶어 하죠. 확실한 건 언제나 하나죠. 힘은 좋은 시에서 나온다는 거죠. 어떤 시인이 좋은 시를 쓰면 힘은 그곳으로 모입니다. 나머지 힘은 가짜 닭 벼슬이죠. 쉰밥이죠. 그 닭 벼슬을 경배하는 신흥 종교를 만들고 은 주발에 쉰밥을 담아도 파리 떼만 낄 뿐이죠. 자신이 파리 떼 중의 똥파리 한 마리임을 자처하고 쉰밥의 밥풀 한 톨이 되길 바란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에요.
동시, 동화로도 작품 세계를 넓히셨는데요,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동시는 나에게 축복이죠. 시와 산문으로 찌들어버린 영혼에 산삼녹용으로 위무해주지요. 어린이문학과 성인문학을 함께 한 뒤로 건강도 좋아졌죠. 시를 쓰다가 죽을 거라고 호언장담한 지 삼십 년이 넘었네요. 나는 시로 죽었다가 동시로 살아날 거예요. 시와 산문으로 죽어가는 몸에 동화와 동시는 살림의 영양제를 놓아주죠. 그러니 제 문학은 죽기 살기가 반복하게 될 것 같군요. 이제 시냐 동시냐, 시냐 소설이냐, 하는 장르우위론이 없어졌어요. 좋은 문학만이 있을 뿐이죠. 죽기 살기만 있죠.
작품 속에 체험과 일상이 많이 담겨있는데요, 문학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씀은?
체험과 일상이 작품 속에 들어올 때에도 저마다 다른 것 같아요. 감자만 해도 포테이토칩과 휴게실 감자구이와 박스 속 감자와 내가 직접 밭에서 캐는 감자는 다르겠죠. 통조림 속 고등어와 바다에서 헤엄치는 고등어가 다르듯, 일상과 체험이 흙 묻은 호미에 찍힌 채로, 또한 지느러미 펄떡이는 채로 원고지에 놓이길 바라죠. 흙냄새와 비린내와 파도소리를 전해드리고 싶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가닿고 싶은 건, 감동과 발견의 공유와 공감이랄까요. 제가 놀라고 설렌 것들을 독자들과 함께 하고 싶죠. 문학의 바른 자리는, ‘사랑과 구원’ 곧 ‘살림’ 인데, 가엾은 저부터 살려야겠죠. 그 살림의 시와 문학이 끝내는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어요. 살림의 시인, 살림의 교육… 세상 모든 것에 다 포함되겠죠. 살림의 농부, 살림의 회사, 살림의 정치, 살림의 종교, 살림의 대통령. 분쟁과 반목과 억압과 전쟁은 절대로 살림의 세상을 만들지 못하죠. 살림의 시인이 되고 싶어요. 살림과 연대하는 삶을 꾸리고 싶지요. 가닿고 싶은 제 바람이지요.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잘 노는 거죠. 간혹 놀이판을 꾸리죠. 무명 가수와 배우와 제가 “함께 가요. 시아버지!” “함께 가요 시어머니!”라는 ‘문학토크 놀이판’을 몇 차례 열었어요. 앞으로는 시골 마을 회관을 돌며 가요와 시와 연극과 이야기로 어르신들을 만나러 다니고 싶어요. 궁극적으론 제가 태어난 황새울 창고를 고쳐서 <황새울 시 극장>을 여는 겁니다. 잘 놀아야죠. 그러다 보면 시도 잉태하고 산문도 주렁주렁 열리겠죠. 덤으로 막걸리도 있지 않겠어요.
김혜련 기자
ⓒ 상하이방(http://www.shanghaiba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