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의 식민지배를 경험했던 아시아의 많은 지역 중 오키나와가 갖는 의미는 다르다. 홍콩, 인도네시아, 필리핀과 같이 우리가 아는 아시아의 많은 식민 지역 중 유일하게 일정 수준 이상의 자치권이나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유일한 지역이다. 현재는 일반 대중에게 ‘일본의 최남단,’ 또는 ‘아시아의 하와이’로 알려진 오키나와는 일본의 일부가 된지 채 200년도 지나지 않았다.
오키나와는 어떻게 식민지가 되었나?
류큐 왕국(琉球王國)의 흥망
오키나와의 역사는 일본의 그것과 발자취를 달리한다.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으로 나눠졌던 삼산시대(三山時代)가 끝나고, 오키나와 제도를 하나로 통일한 류큐 왕국이 15세기에 등장했다. 류큐 왕국은 명나라나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베트남, 포르투갈, 네덜란드, 일본과 같은 국가들의 중개무역을 도우며 동아시아의 강소국으로 성장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은 류큐 왕국을 ‘유구국’으로 언급하며 조선과 류큐 왕국간의 교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류큐 왕국은 메이지 유신으로 강력해진 일본에 편입된 뒤 1609년 ‘류큐 번’으로 강등되고, 1879년에는 ‘오키나와 현(沖縄県; おきなわけん)’으로 또한차례 강등되어 450년 통일 왕국의 끝을 맞이했다. 비록 일본은 오키나와를 자국 영토의 일부라 일컬었지만, 오키나와 현은 일본 제국에게 식민 지배와 다를 바 없는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과 미국의 식민 통치
일본 제국 오키나와 현
오키나와 제도를 차지한 일본 제국은 오키나와 현과 그 주민들을 탄압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류큐 왕국의 국왕을 도쿄로 보내 작위를 강등했고, 인두세(人頭稅; 가족의 머릿수 대로 내는 세금; 소득에 관계 없는 정액제여서 형평성 문제가 있다)를 주민들에게 강제로 내게 했다. 또한 일본 제국은 오키나와의 경제사정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 오키나와의 경제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배고픔에 굶주린 주민들은 독성이 있는 식물을 먹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일부는 다른 지역으로 이민을 갔다. 일본 제국의 오키나와에 대한 무시와 착취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은 바로 세계 제 2차 대전 중 일어난 오키나와 전투이다. 일본군은 미국을 상대로 오키나와 주민들을 병력으로 강제 동원했다. 건장한 성인 남성들뿐만 아니라, 어린 남학생들까지 병력으로 투입했고, 여성 주민들은 간호사나 군무원으로 강제 노동을 시켰다. 심지어 미국에게 전세가 밀려 급해진 일본군들은 오키나와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인간 방패로 썼고, 다른 이들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현재 오키나와 주민들은 오키나와 전투를 하늘에서 쏟아졌던 미군의 폭탄에 빗대어 ‘철의 폭풍’이라 부른다. 이 외에도 일본 제국은 문화 동화 정책을 펼치며 예전부터 오키나와에서 사용됐던 류큐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미군정 시대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한 미국은 오키나와 제도를 1945년부터 1972년까지 통치하기 시작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미국군 정부 시기로, 1950년부터 1972년까지는 미국민 정부 시기로 나뉜다.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 정부는 일본 영토와 오키나와를 분리시키기 위해 류큐 괴뢰정부를 세웠지만 마오쩌둥의 집권과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해 이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오키나와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우선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설치했다. 이를 기점으로 오키나와와 미군의 끈질긴 역사가 시작됐다. 미군기지 설치를 위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미군들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칼이나 총으로 위협했으며, 미군기지가 설치된 이후에도 잦은 항공기 사고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게다가 항공기나 원자력 잠수함으로 인해 일어나는 소음 공해나 공기 오염, 수질 오염 등으로 인해 오키나와의 농장들을 파괴시켰고, 미군들이 일으킨 잦은 범죄로 오키나와 주민들의 평화로운 생활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의 주요 도시인 고자시(コザ市)에서 미군들에 대한 분노로 인해 1970년 고자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오키나와의 일본 재편입에 대한 낌새가 보이자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기지가 없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오키나와의 일본 재편입을 열렬히 지지하기 시작했다.
일본 재편입 이후
결과적으로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의 영토로 다시 편입됐다. 일본국(日本国)의 우리나라의 ‘도’와 같은 하나의 ‘현’으로 편입됐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의 흔적과 상처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재편입 이후, 오키나와에는 여러 국가의 반감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자국의 영토로 편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결해 주지 않고, 큰 자치권도 부여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반감과, 오키나와에서 행패를 부리는 미군과 미국에 대한 반감이 두드러진다. 특히나 오키나와인들은 미군과 미국에 대한 반감이 크다. 전체 33,000명의 미군들 중, 무려 23,000명이 오키나와에 거주한다고 한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미군들의 항공기는 항상 추락 위험이 있어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으며,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미군들을 ‘걸어다니는 흉기’라고 언급하며 그 반감을 키워나가고 있다. 현재 오키나와에는 미군기지 이전과 매립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에 반해 일본의 안보를 중요시하는 자민당은 미군 기지를 이전하거나 매립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그 덕분에 자민당과 자민당의 후보들은 오키나와의 선거에서 큰 패배를 맛보게 됐다. 그리고 현재, 오키나와에는 미군기지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 낌새가 보이고 있는데, 일본 본토 야마구치현(山口県;やまぐちけん)의 이와쿠니(岩国;いわくに)를 미군이 새로운 거점 지대로 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중급유기나 스텔스기 같은 미군의 많은 항공기들이 이와쿠니로 이동했다. 이 외에도 반중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는데, 2012년 7월부터 중국의 공산당 정권이 오키나와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류큐 왕국이 청나라의 번속국(藩屬國;속국과 비슷한 개념)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에 대한 냉정한 반응을 보이며 똑같이 반중감정을 키워나가고 있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일부가 된 현재까지도 세계 열강의 힘 다툼에 치이며 치열하게 살아나고 있다.
오키나와의 현재
오키나와는 홋카이도, 혼슈, 큐슈, 시코쿠로 대표되는 일본 본토와는 다른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 본토의 주민들과는 다른 문화, 가치관과 생활상을 띈다.
오키나와의 음식
일본 본토는 무려 1200년 동안 육식을 금지했던 역사가 있다. 이로 인해 소와 돼지같은 기본적인 육류 요리가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자유로웠던 오키나와에서는 돼지고기 요리가 발달했다. ‘오키나와인들은 돼지의 울음소리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키나와의 돼지고기 요리는 유명하다. 특히 오키나와에서만 자라는 돼지 종류인 ‘아구(アグー)’를 많이 사용한다. 반면 일본 본토와는 다르게 생선 요리는 발달하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으로 인해 발달된 식문화도 다양하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의 5대 맥주 중 하나인 오키나와의 오리온 맥주는 미국 통치 시기 일본 본토와의 차별화를 위해 미국의 맥주 제조법을 도입해 탄생했다. 또한 오키나와에서 크나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간식 중 하나인 타코라이스는 미국에서 흔히 먹는 타코에서 빵 대신에 밥을 사용하여 만든 퓨전 음식이다. 처음 미군들을 겨냥해 만들어진 상품이지만 현재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외에도 미군들이 들여온 스팸과 같은 음식도 오키나와의 퓨전 음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키나와의 건축
오키나와의 유명한 건축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슈리성이다. 슈리성은 현재 오키나와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슈리성의 문은 일본의 2000엔 지폐권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의 공격으로 상당히 파괴됐지만, 현재는 복원이 성공적으로 진행중이라고 한다. 슈리성은 일본의 건축물과는 또 다른 모습을 띄는데, 중국의 건축 요소를 많이 들여왔기 때문이다. 또한 오키나와의 더운 날씨로 인해, 오키나와의 전통 가옥에는 그늘과 통풍기능이 잘 발달돼 있다. 현재는 엄청난 태풍 피해로 인해 전통 가옥을 철근 콘크리트를 함께 이용해 짓는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언어
예로부터 오키나와 지역에서 사용됐던 언어인 류큐어는 현재 소멸 위기 언어로 취급 받고 있다. 오키나와의 인구도 적을뿐더러, 일본의 언어 동화 정책이나, 미국의 통치로 인해 언어에 많은 변화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큐어로 쓰여진 노래가 유행하기도 하고, 류큐어 교과서를 일본에서 구매할 수 있는 등, 류큐어는 현재까지도 잘 보존돼 있다. 물론 류큐어는 일본어족의 한 언어나 일본어에서 파생된 방언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본토 일본어 구사자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오키나와에 뿌리를 둔 성씨들이다. 오키나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성인 히가(比嘉)씨도 겨우 49,800명만 사용하는데, 이는 일본의 인구인 1억과 비교해 보면 매우 적은 숫자이다. 오키나와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인물인 아무로 나미에의 성인 아무로도 오키나와 내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성씨이다. 또한 미국 통치의 영향을 받아 오키나와의 중장년층에서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키나와 주민들의 가치관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에게 많은 피해를 입으며 일본 본토에 대한 반감은 조금씩 불붙었다. 실제로 오키나와에선 류큐 독립을 지지하는 정당이 있다. 이들은 류큐 제도가 일본에서 따로 독립해 공화정을 만들거나, 홍콩이나 마카오처럼 고도의 자치권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분리 독립 지지 정당이 있다는 사실이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독립운동가들은 과격한 방법으로 독립의지를 표현하기도 하는데, 1975년 일본의 황태자 아키히토 덴노가 오키나와에 방문을 했을때 이들은 잠복을 해 황태자에게 화염병을 투척한 사례도 있다. 또한 몇몇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들은 일본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기미가요 제창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 중 2000년대 초반 일본 가요계를 평정했던 가수 아무로 나미에와 드라마 ‘고쿠센’ 시리즈로 유명한 배우 나카마 유키에가 있다.
일본 내에서의 오키나와의 모습
오키나와는 외국인들에게는 낭만적인 풍경으로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주류 민족들에게는 오키나와인들은 피부가 까무잡잡하며, 성격이 쾌활하고 건강하다는 스테레오타입이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 대한 이미지나 오키나와의 일본 내에서의 위치가 막연히 긍정적이지는 않다. 일본의 많은 지표나 순위에서 최하위권을 차지한다. 먼저 일본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2010년, 오키나와 현의 1인당 평균 소득은 202만엔으로 일본 평균의 70 퍼센트 정도로 일본에서 가장 낮았다. 미국에게 통치를 당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 내에서 오키나와의 학생들의 영어 구사력이 가장 떨어진다고 한다. 둘째로, 외국인들이 ‘일본’하면 떠올리는 도쿄나 오사카, 후쿠오카와 같은 대도시와는 달리,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도시화가 가장 덜 진행된 지역이기도 하다. 일본의 대도시 30위권 안에는 오키나와 현의 도시가 하나도 없다. 일본 본토에 비해 가난하며,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오키나와 인들을 일본 본토에서 많은 차별을 경험한다. 오키나와인으로서 일본 본토의 회사에 취직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이 많으며, 그 외의 다른 오키나와인들은 호텔이나 관광사에 취직하며 오키나와 내의 관광산업에 종사한다.
오키나와가 갖는 의의
앞서 말했듯이, 오키나와는 세계의 다른 식민 지역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모두 힘든 식민 시기를 지냈지만,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 유수의 국가들은 끝내 독립을 쟁취했으며, 홍콩이나 마카오는 중국의 일국양제 정책으로 인해 오키나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자치권을 누리고 있다. 일본 정부가 오키나와에게 최소한의 자치권은 주지만, 일본 본토에서는 차별을 당하고, 미국과 미군들에겐 아시아의 ‘전략지구’로 밖에 보여질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시작한 일본과 미국의 알력다툼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큰 고통을 받고 있다. 또한 과거 식민 지배를 했던 국가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발전 시켜줬어’라며 외치고 있는 일본 정부의 뻔뻔함은 오키나와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오키나와는 일본에서의 교육 수준, 1인당 소득, 도시화 수준이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이다. 무려 1800년대부터 오키나와를 지배한 일본은 오키나와의 경제적 발전은 외면하고 있다. 식민지배가 결국은 국가와 민족간의 이기심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가 말해주고 있다.
고등부 학생기자 정형주(콩코디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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