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인구가 2번째로 많은 인도도 식민지배의 아픔을 피해가지 못했다. 정확한 식민지 기간은 넓게는 1757년부터 1946년까지를, 좁게는 1877년부터 1946년까지로 본다.
인도가 식민지배를 받게 된 배경을 살펴보려면 식민지가 된 1757년부터 약 15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상활동을 적극 권장했고, 1600년 12월 31일 영국의 영향력 있는 상인들에게 인도 무역 독점권을 15년간 부여했다.
125명의 주주가 일종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풍부한 자원, 그 중 특히 아편을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영국-인도’간의 삼국무역이 이루어졌고, 더 나아가 아편전쟁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식민지배의 시작
18세기 중엽, 무굴 제국의 통일이 붕괴됨에 따라 인도는 여러 나라로 분리되었고, 내분이 끊이지 않았다. 1757년 인도의 독립된 국가 중 하나였던 벵골의 태수, 시라지 우다울라는 동인도회사가 벵골의 경제에 타격을 입힌다고 항의하고 영국인들을 추방했으나, 영국 장수 클라이브는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군 2900명, 프랑스의 원조를 받은 인도 군사는 7만 명, 수적으로 보면 인도군이 이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인도의 몇몇 장수들이 이미 영국군에 의해 매수되어 벵골은 참패를 맛봤다. 우다울라의 뒤를 이은 태수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영국에게 복종했고, 이로써 영국의 인도 식민지화는 시작되었다. 인도의 남쪽 지역부터 차례차례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1849년 인도 북부와 파키스탄 중북부에 걸쳐있는 펀자브 지역까지 식민지로 만들면서 인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세포이 항쟁과 동인도회사 해체
동인도회사는 인도인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군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을 ‘세포이’라고 불렀다. 동인도회사가 세포이의 해외 파병을 결정하자, 1857년 5월 10일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세포이들은 인도 내에서 비교적 높은 신분에 속해 있었는데, 열악한 환경의 해외로의 파병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또한, 새로 보급 받은 총에 소와 돼지 기름이 발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델리 지역의 세포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인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시작된 항쟁은 동인도회사의 식민지배 폐지 요구까지 이르게 되었다.
항쟁 과정 중 세포이 용병들은 무굴 제국의 재건을 꾀했으나, 현실적으로 몰락 직전의 무굴 제국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동인도회사는 영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1857년 무굴 제국을 멸망시켰고, 1859년 항쟁을 완전히 진압했다. 영국은 인도에 대한 실질적 지배를 이루기 위해 동인도회사를 해체, 1877년 인도 제국이 세워지고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영국의 본격적인 식민지배가 이루어졌다.
혹독한 식민지배와 독립운동
식민 시절 인도는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시절 못지 않게 힘들었다. 영국은 인도인들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했다. 마스크 하나만 쓴 인도인들을 독가스가 가득 찬 방에 가두어 어떻게 죽어가는지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실험 참가자들은 피부에 심한 화상을 입거나 질병에 걸렸고,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렀다. 또한, 목화 사업을 위해, 인도인들이 가꾸어 놓은 밭을 목화 밭으로 바꾸어 수많은 인도인들이 굶어 죽게 만들었다.
세포이의 항쟁 후에도 인도인들의 반영 독립 운동은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결국 영국은 1905년 벵골 분할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벵골은 힌두교가 많은 서벵골과 이슬람교가 많은 동벵골로 나뉘게 되었으나 인도인들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영국은 1911년 이를 철회시켰다. 또한, 영국은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면 인도를 독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롤라트법(1919년 3월)을 시행해 민족운동을 하는 자들을 구속영장 없이도 체포해갔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
인도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 당시 인도는 힌두교의 인도 국민 회의파와 이슬람교도의 회교 연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간디는 힌두교든 이슬람교든 다 단합해야 한다고 외쳤고,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간디의 지도 하에 독립운동이 더욱 확산되어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기나긴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인도는 통일되지 못하고 힌두교도들이 많이 사는 인도 연방과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을 이루는 파키스탄으로 갈라섰다. 파키스탄은 인도연방을 사이에 두고 행정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71년 동파키스탄이 오늘날의 방글라데시로 독립되었다.
식민 지배의 흔적
영국 식민 지배가 인도에 남긴 흔적은 지금까지도 찾아 볼 수 있다. 인도의 국민 야구로 불리는 크리켓은 13세기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졌으며 식민지배 당시 인도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또한, 인도의 여러 지명들도 영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예를 들어 봄베이와 마드라스가 있다. 하지만 현재 인도는 이러한 식민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봄베이를 뭄바이로, 마드라스를 첸나이로 바꾸었다.
또한, 총리공관의 주소를 ‘레이스코스 로드(경마장길)’에서 힌디어인 ‘로크 칼리안 마르그(공공복리길)’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기념관, 웨일스 왕자 박물관 등 영국이 당시 세웠던 건축물과, 영국의 독립 약속을 믿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희생당한 인도 군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인디아게이트 등 식민시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관광지들이 있다.
고등부 학생기자 강민혜(상해한국학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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