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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①] 임시정부 요인 묻힌 만국공묘

[2013-10-12, 23:31:36] 상하이저널
상하이저널 창간 14주년 기획
상하이·화동지역 우리 역사를 찾아서
- 항일운동 발자취 ①만국공묘
 
임시정부 요인 이곳에 잠들다

창닝구 송칭링능원 내 외국인묘원(外籍人墓园)
 
 
 

구베이에서 가까운 송칭링능원(宋庆龄陵园),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방문객들이 간간히 눈에 띈다. 헌화는 물론 세차례의 목도로 이어지는 참배의식은 자못 숙연한 분위기다. 연 1000만명 이상의 참배객이 그녀의 무덤에 헌화를 한다고 하니 중국인들의 송칭링에 대한 사랑을 잘 느낄 수 있다.

1981년 송칭링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면서 명칭이 만국공묘(萬國公墓)에서 송칭링능원으로 바뀐 이곳은 우리 교민들에게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등 5인의 묘지 초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민 거주지역에서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교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능원에 들어서면 송칭링동지영화불후(宋庆龄同志永垂不朽)라는 큰 비문이 들어온다. 이 비문 뒤쪽으로 향하면 기념관과 동상 등이 자리하고 있다. 외국인묘역은 능원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묘역 중에서도 맨 위쪽으로 올라가야 겨우 찾을 수 있다. 전날 태풍과 폭우로 잘 정돈되지 않은 탓인지 이들의 초석이 더욱 쓸쓸해 보인다.
 
유해 보존의 숨은 공로자

1993년 한국에 봉환되었던 임시정부 지도자의 유해가 처음부터 모두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규식의 경우 처음부터 만국공묘에 묻혔지만 박은식, 노백린, 안태국의 유해는 만국공묘가 아닌 징안사공묘(静安寺公墓)에 안장되어 있었다.

징안사공묘에 묻혀 있던 그들의 유해가 만국공묘로 옮겨지게 된 데는 숨은 공로자가 있다. 푸단대 역사학과 순커즈 교수 등에 따르면, 1955년 상하이시 도시개발로 징안사공묘가 교외지역으로 이전되면서 박은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가 무연고 묘가 될 지경에 처했었는데 이들의 유해가 보존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선우혁, 김시문 두 사람의 힘이 컸다고 한다. 이들은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하이에 살고 있어 가능한 일이었던 것.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는 영원히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만국공묘에서 임시정부 요인 5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데는 그들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한글로 새겨진 5人의 초석

외국인묘역의 초석들은 대부분 영문으로 새겨있다. 그 속에 눈에 들어오는 한글은 감동마저 느껴진다. 한글 이름 아래는 1995년 8월 5일 대한민국으로 이장했다는 글귀도 함께 새겨있다. 1993년 한중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그들의 유해가 한국에 봉환됐다. 한중 수교 1년 후인 1993년 8월, 한중 양국 정부의 노력으로 상하이에 묻혀있던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을 비롯한 신규식, 노백린, 안태국, 김인전 등 임시정부 요인의 유해 5위가 한국으로 봉환되는 장면을 기억하는 교민들은 그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고 전한다.

1993년 이후 현재 그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당시를 보여주는 초석이 남아 한국인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은 일제에 저항하며 상하이에서 운명하는 순간 나라를 찾는 걸 못보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한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모두 같은 유언을 남겼으리라. 만국공묘에 서면 ‘대한민국의 독립’을 바랐던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송칭링 능원

1981년 중국의 국부 쑨원(孙文)의 부인이었던 송칭링(宋庆龄)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만국 공묘에 있던 그 부모 묘 옆에 안장했다. 그러면서 이 공묘는 송칭링능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물론 송칭링능원 내의 외국인묘역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만국공묘라고 부르고 있다. 송칭링 능원의 넓이는 대략 12만㎡으로 크게 송칭링의 묘지와 백색의 송칭링 조각상, 송칭링의 인생을 그린 박물관, 중국 명인들의 묘지구역, 외국인 묘지구역으로 나뉜다.

▶주소: 长宁区宋园路21号
▶전화: 021)6275-8080
▶개방시간: 08:30~17:00
▶지하철 10호선 송위엔루(宋园路)역 2번 출구 도보 2분
 
▷고수미 기자
 
 

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장례식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장

1919년 이후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생로병사의문제가 자연스럽게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온 인사들 가운데 고령이거나 지병이 있는 경우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운명의 순간 유언을 남겼는데, 대개 나라를 찾는 걸 못보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오직 천추의 한이라는 게 이구동성이었다.

그들에 대한 장례는 간고하면서도 엄숙했다. 특히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의 장례는 근대적 의미로 한국역사상 최초의 국장(国葬)이었다. 1925년 11월 1일 오후 8시 박은식은 상해의원에서 향년 68세로 서거했다. 임시정부는 박은식의 장례를 국장례로 거행한다고 선포했다.

발인지는 11월 4일 오후 2시 푸시루(蒲石路) 현재의 창러루(长乐路) 14号 자택이었다. 수백명에 달하는 동포들이 상여마차 양쪽으로 나란히 서서 묘지를 항해 행렬할 때 노상의 행인들이 모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상하이의 각 신문사 기자들도 경쟁적으로 이 모습을 촬영했다.
 
상여마차가 장지인 징안사공묘(현재 징안공원) 예식당에 도착했다. 당시 공동조계 난징시루(南京西路)에 있던 징안사공묘 역시 외국인 묘지였다.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애국가를 합창하는 것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이윽고 고인의 유해가 안장된 것은 오후 5시경이었다. (출처: 상해의 한국문화지도)
 
 
만국공묘에 잠든 5인은 누구
 
박은식 [朴殷植, 1859~1925]
 
 
한말의 민족사학자•독립운동가. 《황성신문》의 주필로 활동했으며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항일활동을 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申圭植)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博達)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지었다.
1918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遺囑)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靜安吉路)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규식 [申圭植, 1879~1922]

 
청주(淸州) 출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가. 구한말 계몽운동을 펼치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을 강제 당하자, 이에 분개하여 자결을 기도, 그 여파로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해로 망명,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1912년 이후 동제사, 신한혁명당 등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주도하였고, 1917년에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였다.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충청도 의원으로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법무총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21년에는 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으로서 손문의 광동정부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초기 임시정부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다가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을 계속하다 목숨을 끊었다. 사후 상해 만국공묘에 안장되었다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봉환하였다.
 
 
노백린 [盧伯麟, 1875~1926]
 
황해도 은율(殷栗) 출생. 한말의 독립운동가.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광산(鑛山)•피혁상(皮革商) 등을 경영하였다.
191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朴容萬)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군사훈련에 힘썼고,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總長)을 맡았다.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에 진력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한 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가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인전 [金仁全, 1876~1923]
 
 
충남 서천 출생. 일제강점기의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으며, 안창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를 조직하였다.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히고, 재무예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임시의정원 부의장도 지냈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에 임명되고, 1921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제4대 의장에 뽑혔다. 같은 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5월 사망하여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가, 1993년 8월 유해(遺骸)가 환국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태국(安泰國, 1880∼1920)
 
 
평안남도 평양 출생. 독립운동가. 을사조약 후에는 실업구국운동에 종사했으며, 이승훈(李昇薰)• 최응두(崔應斗)등과 함께 상민공동회(商民共同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평안남도 총감(總監)이 되고 신민회의 최고위 간부가 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신민회가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국외에 무관학교나 독립군기지 창건의 준비사업을 하는 중에 일제는 간도(間島)에 독립군기지를 설치하는 운동을 벌리는 자들을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묶어서 신민회 중앙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으며, 안태국도 1911년 1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일제는 다시 신민회를 해체시키고 한국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전국의 신민회 회원 800명을 일거에 검거한 다음 복역 중인 안태국을 재기소하였다. 그는 공소심에서는 징역 6년의 언도를 받고 동지들과 함께 5년의 옥고를 치렀다.
1916년에 출옥하자 바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3•1운동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문제를 임시정부와 협의하기 위해 상해로 갔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1920년 4월 11일 상해 홍십자 병원에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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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의견 수 2

  • 아이콘
    SClara 2013.10.22, 10:07:00
    수정 삭제

    몇년 전 고등학교 선생님이신 이모부가 상하이에 관광 오셔서 가장 먼저 들리셨던 곳이 여긴데요.. 그땐 왜 이곳이 이모부가 처음 들리시는 관광지인지 의문이였습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ㅎㅎ 집 근처니 한번 더 들러봐야 겠습니다. 매주 뜻깊은 역사공부 하고있어요! 감사합니다.

  • 아이콘
    그러게요 2013.10.31, 16:39:09
    수정 삭제

    가까운 곳에 이런 뜻깊은 곳이 있었네요.......
    주말에 당장 가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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