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문학은 긴 역사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하다. 시대적 배경, 종교 등에 따라 여러 형식과 색체로 나뉘었고 아시아지역 문학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상고문학, 근현대문학, 당대문학 등으로 크게 나뉘는 중국 문학에 대해 알아보자. 이번 주는 송나라 문학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중국의 오대십국(五代十国)을 통일한 왕조로, 1126년 ‘정강의 변’을 전후해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으로 나뉜다.
북송은 오대십국의 최후 왕조인 후주(后周)의 금군(국왕의 친위군) 조광윤(赵匡胤)이 ‘진교병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뒤 건립했다. 건국 초기 북송은 중앙집권제를 실시해 중원과 남방의 통일을 이룩했지만, 서북지역은 거란족이 요(辽)를, 당항족이 서하(西夏)를 건립해 끊임없이 위협받았다. 북송은 거란족과 화친하며 외교정책을 펼치는 한편, 국가 재정의 재건을 위한 신법을 실시했다. 그러나 보수파의 저항으로 정치가 혼란해지며 위기를 맞게 된다.
이를 틈타 여진족이 ‘정강의 변’을 일으켰고, 난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간 고종(高宗)이 남중국 임안(지금의 항저우)에 남송을 재건했다. 이후 여진족이 세운 금(金)과 화합하고 중국의 남부지역을 지배했으나 금이 몽골군에 의해 멸망한 후, 남송 역시 1279년 애산전투에서 패배하며 멸망했다.
정강의 변: 여진족이 세운 금은 요를 멸망시켰으며, 이 여세를 몰아 1126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开封)을 점령하고 휘종(徽宗)과 흠종(钦宗)을 포로로 잡아가 송 왕실의 혈통이 중단된 것을 일컫는다.
송나라의 문학
송나라의 문학은 시가, 사, 산문, 소설, 희극 등 다방면에서 발전했다. 특히 당시는 유·불·도교의 융합과 정치, 경제, 사회,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이학(理学, 성리학과 도학)이 크게 성행했으며 유가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다시 체계화 됐다.
당시, 송나라의 중심 세력이 지식 계층과 시민 계층으로 옮겨가며 사회구조가 크게 변화했고, 인생의 의의와 우주의 질서에 관한 고찰이 성행함으로 인해 학자들 역시 ‘우주, 인생, 사회, 입세, 출세’ 등 자신과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원칙을 추구했다. 이런 원칙과 사상은 문학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송나라 문학의 사상적인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이학의 학술체계가 유가 정통 사상에 근본을 두고 있는 만큼 문학 역시 유가의 문학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학(禅学, 참선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요시하는 불교 선종의 가르침) 사상의 영향이다.
시가(诗歌)
중국 문학사에서 ‘송대의 문학은 사(词)’라고 특정 지을 만큼 송사가 대표적이었지만, 송시(宋诗) 또한 독특한 특색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송대의 시가는 ‘이를 말하되 정은 말하지 않는다(言理不言情)’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당시와는 전혀 다른 시격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송시는 명(明)대의 많은 문인들이 ‘글은 반드시 진과 한을 따르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따라야 한다(文必秦汉, 诗必盛唐)’고 규정하며 중시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명맥이 이어지지 않아 끝내 부흥하지 못했다.
시가는 북송시(北宋诗)와 남송시(南宋诗)로 나뉘며, 북송시는 서곤파와 강서시파로, 남송시는 남도4가, 영가4령, 강호시인 등 다갈래로 분류된다.
북송시
① 서곤시파(西昆诗派)
북송은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문학 또한 함께 발전했다. 특히 국가의 문한기관이던 한림원에서는 연회를 개최해 시가를 낭독하는 일이 잦았고, 이런 사회분위기는 시가의 형식에 큰 영향을 줬다. 서곤시파의 시는 사회적 배경을 노래한 이전 시대의 문학과 달리 내용보다 아름다운 형식에 치중했으며, 마침내 서곤체의 유행을 이끌었다.
서곤체는 약 40여 년간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요 시인은 양억(杨亿), 유균(刘筠), 전유연(钱惟演)을 비롯한 10여 명으로, 모두가 궁정 대신이거나 한림학사들이었다. 훗날 이 서곤체를 본받아 시를 짓는 문인의 수가 적지 않았지만, 내용이 허망하고 기교만 중시함으로 인해 감정과 개성이 없다고 평가되기도 했다.
양억(974~1020) 북송시대 서곤시파를 대표하는 뛰어난 문학가이자 정치가로 성격이 강개하고 경직해 교류를 중시하며, 다른 시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시를 지을 때 사조가 화려하고 운율이 풍부하기로 유명했다. 태종실록(太宗实录), 책부원구(册府元龟) 등을 편찬하고, 시 200여 수를 모아 서곤수창집(西昆酬唱集)을 편찬하기도 했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금중정수(禁中庭树)가 있다.
直干依金闼,繁阴覆绮楹。
累珠晨露重,嘒管夜蝉清。
霜桂丹丘路,星榆北斗城。
岁寒徒自许,蜀柳笑孤贞。
곧은 가지는 대궐문에 걸치고,
짙은 그늘은 문틀을 덮었구나.
연이은 구슬은 새벽 이슬을 머금고,
퉁소 소리 밤 매미보다 청아하구나.
계수나무 빨갛게 물든 언덕길,
흰 느릅나무 늘어선 북두와 같은 성곽,
날씨는 자못 차가운데,
파촉의 버드나무 외로운 정절을 비웃는다.
② 강서시파(江西诗派)
송시는 앞서 설명한 서곤시파와 강서시파로 나뉜다. 서곤시파의 서곤체는 주로 문한기관이던 한림원의 연회 때 화답시가로 사용됐으며 쉽게 유행하고 쉽게 소멸했다. 반면 강서시파의 강서체는 문학을 애호하는 이들이 배우고 익혔으며, 오랫동안 전수됐다.
강서시파의 시인으로는 진사도(陈师道), 반대림(潘大临), 사일(谢逸), 홍추(洪刍) 등이 있다. 이들은 시의 내용이나 사상에서 새로운 변화는 없었지만. 개인적인 생활 경험이 묘사돼 있거나, 민족간의 갈등을 노래하는 등 현실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황정견 (黃庭堅, 1045~1105)
장뢰(张侥), 조보지(晁补之), 진관(秦观)과 더불어 소문4학사(苏门四学士)로 불린 인물이다. 강서시파는 해당 시파의 중축이었던 황정견의 출신지 강서를 따와 이름 붙여졌다.
황정견의 가장 유명한 시가 이론으로는 '환골탈태(换骨脱胎)'와 '점철성금(点铁成金)', '요체(拗体)'가 있다. '점철성금'의 뜻은 남의 글을 조금 다듬어서 훌륭한 글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고, '요체'는 정해진 작시법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아울러 황정견은 요체를 활용함으로 독특한 시격을 이룩했다고 평가 받는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기황기복(寄黄几复)이다.
我居北海君南海,寄雁传书谢不能。
桃李春风一杯酒,江湖夜雨十年灯。
持家但有四立壁,治病不蕲三折肱。
想见读书头已白,隔溪猿哭瘴溪藤。
나는 북해, 그대는 남해에 살다니,
기러기 편에 편지를 부치려 하나 사절한다오.
봄바람 복사꽃 한창일 때 한 잔 술을 마시지만,
강호에 밤비는 내리고 외로이 등불 대하기 10년이구나.
집이라야 가진 것이 없이 네 벽만이 덜렁 서 있는데,
병을 치료하자니 양의(三折肱)가 아니면 안 될 것을.
그리워라 공부할 때 친구들 이미 백발이 성성한데,
시내 건너 원숭이 울음소리 등나무에 응어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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