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u’s Interview 7th]
기록을 모으는 사람_영화필름 수집가 리우졘 刘建
‘영화테마단지’를 꿈꾼다
취미로 시작한 영화필름 수집,직업이 되어 가는 중
연말이다. 또 한 해가 기록의 창고로 들어간다. 다 쓴 수첩을 속지만 빼서 표지에 ‘~2013. 12’라고 쓰고 책장 한 모퉁이에 올려 둔다. 먼저 와서 색이 바랜 수첩들이 제법 탑을 쌓고 있다. 지우지 못 하고 찢어내지 못 하는 수첩에는 지난 한 때의 내가 오롯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기록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긴다. 도대체 누구 것인지 모르는 전화번호, 당장 할 일이라고 적어두고 며칠 뒤에 또 보이는 것도 많다. 게으른 천성이 엿보인다. 잊었으면 하는 이야기도 있다.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은 이름, 중요하다고 따로 접어두고 찾지 못 하는 메모도 있다. 부끄럽고 미안한 한 해였다.
왜 기록할까? 그리고 지난 기록을 들춰내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기억을 위한 기록이다. 한 역사가는 역사는 기록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위한 참고 역할을 할 때 비로소 그 존재가치가 있다고 했다. 역사가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기록된 시간을 되돌려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다양한 기록의 형태 중에서 영상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기록 방식이다. 하지만 일단 등장하고 나자 그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세계가 양편으로 나누어져 진영 싸움을 시작하자 영상은 가장 강력한 선전 도구로 환영받았고, 이는 폭발적인 생산량 증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두 진영의 싸움이 끝난 지금도 우리는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리우졘刘建은 이 강력한 기록의 흔적을 모은다. 그는 오래된 영화필름을 수집한다.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서는 상하이에서 북쪽으로 2시간 반 거리에 있는 루까오如皋 시에 가야 한다. 오랜만에 면허증을 꺼내고 차를 빌려서 길을 나섰다. 중국 3대 장수마을로 알려진 이곳에서 그는 나고 자랐다. 대부분의 수집가처럼, 그의 직업은 따로 있다. 건네받은 그의 명함에는 웹 서비스 업체의 최고법률책임자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회사의 사무실 한 칸을 비워서 모으기 시작한 영화 필름은 이제 한 층을 통째로 쓰는 규모로 불어났고, 취미생활로 시작한 수집은 이제 그의 새로운 직업이 되어 가는 중이다.
작년 필름제조업체 생산중단, 시대의 유산이 될 필름 본격 수집
그의 필름 컬렉션은 개인의 규모를 넘는다. 온도 습도가 조절되는 몇 개의 창고 방은 이미 영화필름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원형의 금속케이스 안에는 돌돌 말린 필름들이 있고 그중에는 영화관으로 배포된 후 한 번도 개봉되지 않은 상태의 필름도 여럿이다.
이 모든 것이 10년도 채 안 된 사이에 모은 것이고, 본격적인 대규모 수집은 최근 2년 사이에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또 한 번 놀란다. 우연히 보게 된 필름에 흥미를 느낀 그가 수집을 시작한 것은 2007년 무렵이다. 그리고 몇 년 안 되는 기간에서 작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시대를 기록하는 사람들에게 필름을 제공해왔던 코닥, 후지 등 유수의 필름 제조 업체가 2012년을 마지막으로 더는 필름을 생산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국의 마지막 필름 영화, 펀샤오강의 ‘1942’도 수집목록에
세상을 기록하던 필름이 이제 역사의 기록 속에 들어앉게 됐고, 리우졘은 시대의 유산이 될 필름을 본격적으로 수집해야겠다고 결심한다. 항일전쟁 시기를 소재로 하는 펀샤오강冯小刚 감독의 2012년 제작 영화 <1942>가 중국에서 필름으로 제작된 마지막 영화다. 물론 이 영화도 그의 수집 목록에 있다. 회사 곳곳에는 아직 포장도 뜯지 못 한 채 포댓자루에 담긴 필름들이 수북했다. 수를 헤아리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다만 많고, 그마저도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 정확한 숫자를 특정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저 필름들을 모두 이어서 틀어놓으면 손자까지 보아도 다 못 볼 것이다.
“50~70년대 필름을 주로 수집한다. 그리고 90년대 이후의 것도 모은다. 시기상으로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 것은 별로 모으지 않는데, 그때는 컬러필름의 초기인데, 기술이 축적되지 않아서 필름의 품질이 낮다. 내용면에서도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 같다. 반면에 70년대 생산된 흑백필름은 기술의 성숙기에 있어서 오히려 필름 상태가 더 좋은 것이 많다. 내용 면에서 따로 가리는 것은 없다. 특별히 중요한 배우가 나온다면 그것도 모으고 전쟁, 연애,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필름을 모은다. 그중에 특히 지난 시대의 풍경을 볼 수 있는 필름들을 좋아한다. 이제는 사라져서 볼 수 없는 거리는 필름 속에 남아 있다.”
되팔려고 모으는 것 아니다,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려 한다
“잘 골라 사서 몇 년 가격이 오르기를 기다려 되팔려고 모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이 필름들을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기에는 같은 영화 필름이 열 벌 넘게 있는 것도 있다. 그냥 보관과 목적이 판매라면 그렇게 모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이 필름들을 모두 상영하려고 한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와서 좋은 필름을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필름이 한 벌밖에 없다면 감히 상영할 생각을 하기 어렵다. 관리도 같은 맥락이다. 그냥 넣어두고 영원히 가지고만 있다면 보통 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필름을 보관하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러면 상영을 위해 꺼낼 때 큰 온도 차가 필름에 손상을 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곳 보관실의 온도는 15~20도를 유지한다.”
영화박물관을 만들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 함께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좀 더 나아가면 영화 관람과 제작까지 가능한 영화 테마 단지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그의 계획이 순조롭다면, 몇 년 뒤에는 중국 전역의 영화광들이, 그리고 세계의 필름 애호가들이 이 작은 도시 루까오를 찾아올 것이다. 여유를 갖고 머물며 지난 필름들을 돌려보기도 하고 마음 맞는 몇이 모여서 당장 촬영을 하자고 덤벼드는 장면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필름 수집은 겨우 첫걸음일 뿐이다. 감탄은 좀 더 아껴두어도 될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구해 둔 80년대 북한영화 ‘나의 어머니’
리우졘은 이번 인터뷰를 위해 얼마 전에 구해두었다는 북한 영화 필름을 보여주었다. 육중해 보이는 영사기에 필름이 걸리고, 필름이 톱니를 물고 돌아가는 틱틱거리는 규칙적인 소리도 낯설다가 이내 익숙해진다. 아, 내 기억에도 있는 소리였구나. 아주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 한 번씩 영화를 보러 가면 영화관에서 가장 높고 이상해 보이는 방에서 저런 소리가 빛과 함께 나왔었다. 잊었던 기억이다. 심심한 기록필름일 것이라는 예상은 틀렸다. 영사기에 빛이 들어오고, 화면이 펼쳐진다.
영화는 어릴 때 딸을 잃어버린 엄마가 할머니가 되어 딸을 찾는 이야기였다. 제목은 ‘나의 어머니’, 장춘영화제작소에서 80년대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80년대의 북한 말은 생각보다 이질적이지 않았고, 화면 곳곳에 가득한 필름 상처들도 집중에 방해되지 않았다. 갓 태어났을 때 봄녀라고 부르던 딸은 금옥이로 이름을 바꾸는데, 돈 많이 벌어와서 금옥이 복주머니를 가득 채워주겠다던 아빠는 징용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 했다. 영화 필름은 몇 개로 나누어져 있고 시간 사정상 가장 앞 필름 하나 밖에 보지 못 했다. 금옥이는 ‘나의 어머니’를 만났을까?
기록하는 작업은 자신과 떨어진 시공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
책장에 쌓아둔 내 지난 수첩을 들춰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자주 보아서 잊지 말자고 두는 기록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저것들이라도 있으면 지난 시간을 허송한 것 같지 않아서, 무심코 보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워질 때 지난 수첩을 펼쳐보면, 미치듯 살아낸 시간은 못 되더라도 무엇이라도 하며 왔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두는 것이다. 어쩌면 나중에 내 아이가 지금의 나를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록하는 작업은 자신과 떨어진 시공간에 대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고, 다른 시공간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적 만족은 지금의 시공간에 있는 내가 느끼는 것이다. 영화 필름으로 가득 채운 방 한 가운데 서서 가만히 혼자 미소 지을 리우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모은 기록의 산 위에 나는 그에 대한 기록 한 줄을 보태 놓는다.
▷사진·글: Mark 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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