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음식점에 들어갈 때면 눈이 따끔거리면서 눈물이 나곤 했었다. 코보다도 눈이 먼저 공기 중에 떠도는 냄새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 눈을 자주 깜박거려도 보고, 억지로 눈물 고이게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어, 연신 문질러대기라도 하면 실핏줄이라도 터진 양, 두 눈만 벌겋게 충혈될 뿐, 급기야 인공눈물 한 방울을 넣어보아도 별다른 효과도 없어 보이고, 라식 수술 부작용인가? 걱정도 되고, 이러다가 정말 시력을 잃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황 시나리오를 머리 속에 그리자 마음이 절로 무거워졌다.
대학 시절 시력 교정수술을 받은 남동생 둘은 아무런 이상 없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잘들 지내고 있는데, 마흔이 넘어 겨우 용기를 내서, 겨우 몇 년, 안경 없는 세상이 이렇게 좋고도, 편하구나를 즐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왠 청천벽력?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막내 동생이 갑자기 누나 집에서 2~3일 지내고 싶다는 전화가 왔었다. 시력교정수술을 받았는데, 고단백을 섭취해야 한다면서. 90년대 초반, 시력교정수술을 받는 사람들이 그다지 흔하지 않던 때였다. 그 당시 렌즈 착용에 별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던 나로서는 수술이란 말이 그냥 낯설고 무모해 보이기만 했었다.
대학합격이란 소식에 엄마가 제일 먼저 선물 해준 것이 소프트 콘텍트렌즈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한 나는 고등학교 내내, 안경이 코뼈를 눌러서 아프고 두통도 난다면서 렌즈를 착용하게 해 달라고 졸랐었다. 엄마는 대학가면 해주겠다고 약속했었고, 발표가 나자마자 안과로 갔었던 것. 렌즈 착용이 불편한 점도 많았다. 소독도 해야 하고, 렌즈가 찢어지기도 하고, 물에 씻겨 내려가기도 하고, 등등. 그래도 시력교정수술을 꼭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었는데, 수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도수있는 수경을 착용해야 하는 게 너무 불편했다.
그래서 결심했었다. 수술을 받기로. 정밀 검사를 통해 각막의 두께를 확인하고 마취안약으로 동공을 확대시키는 과정을 거치고, 레이저로 각막을 태우는 듯한 냄새가 나더니, 정말 순식간에 수술과정이 마무리 지어졌다. 교정수술을 받고 병원을 나설 때의 그 기쁨은 정말 놀라웠다. 세상이 환해지고 있었다. 동생들의 래미안을 너무 늦게 받아들인게 후회될 뿐이었다.
그리고 몇 년을 정말 편하게 지냈다. 렌즈를 소독하는 일도, 안경을 닦는 번거로운 일도 더 이상 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여행갈 때나 집을 잠시 떠날 때면 늘 불룩~하게 가방 한 구석을 차지하던 식염수통을 챙기지 않아서 좋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할 것을… 그리고 마음먹었었다. 안경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는 딸아이는 되도록 빨리 교정수술을 해줘야겠다고.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기 그지없다고. 그 때의 그 기쁨은 다 잊어버리고, 눈이 따끔거리고 눈 끝이 눈물로 짓물러지기 시작하면서, 괜히 수술한 거 아냐? 그 수술 때문에 노안만 빨리 온 거 아냐? 분명 나이가 들어서 노안이 와서 불편한게 틀림없는데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떨어봤다. 불편한 눈을 호소하려고 다시 찾은 안과에서는 노안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눈물샘이 막혀서 눈물이 눈 밖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거라고 눈물샘을 뚫어주었다.
이제는 거울 속에 비치는 눈을 들여다봐도 결코 맑아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피곤해도 실핏줄이 터져 충혈되기도 하고, 뻑뻑해지는 느낌에 인공눈물에만 자꾸 자꾸 손이 간다. 우리 몸 어느 한구석인들 중요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요즈음 대기오염 지수가 중요 화제거리로 떠오르면서 내 두 눈도 덩달아 시련을 겪고 있다. 아침마다 휴대폰으로 마스크 쓴 아저씨의 대기오몀 지수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내 눈이 정말 걱정된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맑은 눈으로 오래도록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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