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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목숨 최현배

[2013-08-15, 17:20:59] 상하이저널
[조선어학회 항일투사 33인-4]
일제와 맞선 언어독립투쟁

▲ 최현배 선생
▲ 최현배 선생
최현배는 1894년 10월 19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 동리에서 출생하였다. 6세에서 14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7년에서 1910년 3월까지 하상면에 설립된 사립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서 체조, 산술, 일본어 과목도 공부하였다. 이 시절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와 논설을 읽고서 대한제국의 무능을 알아 밤이 깊도록 목 놓아 울기도 하였다.

1910년 4월 관립 한성 고등학교(식민지 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명)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다. 입학하여 첫 번째로 맞은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 고향 동무들하고 바둑 두기 취미가 공부에 방해될 것으로 판단하여 끊어버렸다.

1910년 일제의 국권 강탈 시기부터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이 시기인 1910년에서 1913년까지 주시경의 조선어 강습원에서 한글과 말본(문법)을 배웠다. 신채호가 지은 <충무공 전>도 열심히 읽었다. 민족주의자 주시경과 김두봉의 감화를 받고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스승 주시경을 따라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4년 주시경의 특별한 부탁을 받아 동래군 동명학교에서 열린 하기강습회를 약 20일 동안 하였다. 강습회 도중에 스승의 서거 소식을 들어 무한히 슬퍼하는 한편 한글 운동에 대한 책무를 이어받기로 결심하였다.

졸업 이후, 단 한 명의 관비 유학생에 뽑혀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다. 1915년 4월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재학시절 학우들에게 민족의식, 조국 정신을 품고서 공부하자고 호소하였다.

일본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더욱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였다. 이 시기에 귀국하였다. 1920년 경남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원이 되었다. 우리말을 연구하며 이를 가르쳤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은 암담하였다. 일제의 경제 착취, 조선 문화 말살, 우리민족의 생기가 말살되는 현실을 몸소 경험하였다. 다시 학문을 통해 겨레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다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192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를 수학한 뒤, 그해 4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입학하여 1925년 3월에 졸업(교육학 전공)하였다. 같은 해 4월에서 다음해인 1926년 3월까지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수업을 받았다. 이 대학원 시절에 민족의 흥망성쇠의 근본 원인이 생기의 강약에 달려있다고 생각하여 1년 만에 <조선 민족갱생의 도>라는 초고를 완성하였다. 우리 민족이 되살아 날 방도가 생기의 진작, 갱생의 확신, 이상의 수립, 이상의 달성을 위한 부단한 노력에 달려있다고 역설하였다.

귀국한 뒤, 1926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철학 과목과 조선어 과목을 강의하였다. 철학사 시간에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책에 대해 강의를 하면서, ‘국어 수호는 곧 민족 수호’라고 강조하였다. 같은 해인 1926년 9월에서 12월까지 65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조선민족갱생의 도」라는 글을 연재하였다. 이 글을 1930년에 책으로 펴냈다.

그의 민족갱생은 우리민족의 주권회복을 뜻하였다. 한국민족 구성원 각자가 1개 이상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할 것과 동시에 전민족 구성원의 대동단결을 통해 민족갱생을 이루어내자고 주장하였다. 우리민족 구성원이 가입하기를 희망한 단체는 학술연구회, 청년회, 노동야학회, 신문사, 잡지사, 교육연구회, 실업회사, 국산장려회, 조선어연구회, 소비조합, 사회개조운동단, 과학정신진흥회, 소작인조합, 노동조합 등이었다.

아울러 이 책에서 그는 ‘우리말에 조선심이 있고, 조선혼이 있다.’고 하여 한글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 최현배 선생의 고향인 울산에 세워진 외솔기념관
▲ 최현배 선생의 고향인 울산에 세워진 외솔기념관
 
1926년 11월 30일부터 주시경의 제자들이 만든 조선어연구회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0년에 조선어연구회의 간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에 조직된 조선어사전편찬회에서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우리말의 문법책인 <우리말본>(첫째 매)(1929)을 발간하였다. 여기에 기술된 우리말의 문법 체계를 토대로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이 완성되었다. 그는 우리말본을 동래고보 교원 시절부터 짓기 시작하였다. 두해 여름휴가 기간 동안, 고향 울산의 강동면 소재의 신흥사에서 머물며 우리말본 소리갈(음성학)을 연구하였다.

교토제국대학 대학원 시절에 다시 우리말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연희전문 교수시절에 고향 염포 바닷가에서 두 해 동안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우리말본 씨갈(품사론)을 연구하였다. 염포는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을 최후로 몰아낸 곳이기도 하였다. 최현배는 다시 상륙하여 들어온 일본놈들을 완전히 몰아내고서야 쓰일 수 있는 우리말의 연구를 이곳에서 하였던 것이다. 1929년 4월에 <우리말본>(첫째 매)을 간행하였다.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명되어 등장한 뒤, 그는 1대(1931-1932) 조선어학회의 간사를, 3대(1933-1934) 간사장을, 4대(1934-1935)에서 7대(1937-1938)까지 간사를 역임하였다. 1930년부터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수정위원·정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부터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 및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부터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의 심의위원으로서, 이것의 제정에도 참여하였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을 위한 회의가 123회에 433시간이 소요되었는데, 그는 한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하였다. 표준말의 제정을 위한 회의에도 참여하면서, 회의의 결과를 정리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었던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일요일 하루 전체와 다음날 새벽까지 밤샘을 마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의 우리말의 연구에 바친 정성이 대단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 조선어 표준말의 사정(査定),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의 제정이라는 민족어 규범 수립 운동에 앞장섰다.

한편 그는 1934년 <중등 조선말본>을, 1937년 <우리말본>, <한글의 바른 길>을 펴냈다. <중등 조선말본>은 초판이 3개월이 못되어 다 판매되었다. <우리말본>은 조선어의 어법(語法)에 대해 음성학, 품사론, 문장론으로 분류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였다. 이 책은 총 1,2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일제말까지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지방까지 널리 퍼졌다.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 문법서인 <우리말본>을 당당하게 그가 저술한 것은 실로 우리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처럼 그의 우리 말글 책은 민족정신의 고취에 기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사건(1938, 2-1938, 9)에 연루되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되었다. 사건 관련자는 기소유예처분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후 최현배는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연희전문에서 해직된 상황에서, 우리문자인 한글을 연구하며 보냈다. 1940년 우리문자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한글갈>을 완성하여, 1942년 5월에 펴냈다. 총 829쪽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최현배는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에 맞서 민족주의 언어관에 입각하여 있었다. 그는 “말은 그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라, 정신이 없는 몸뚱이가 살아갈 수 없으며, 흥해갈 수 없음도, 또한 당연의 사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말이 쇠함을 따라 그 임자인 겨레가 쇠하며, 말이 망함을 따라 그 임자인 겨레가 또한 망함을 나타내는 실례가 없지 아니하니, 만주 말과 만주 겨레가 곧 그것이다”(<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63쪽.)라는 언어민족일체관을 평생 지녔다.

동시에 그는 조선 민족과 일본 민족은 근본적으로 다르고, 조선 민족은 불멸하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혈통·생활 근거지·언어·민족 특질·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민족의 구별이 생긴 것이며, 민족이 소멸할 이(理)가 없다’(<조선 민족갱생의 도>,137쪽.)고 자신의 민족 인식을 밝혔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

일제는 언어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고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관련자 33인을 검거하였다. 이 때 핵심인물인 그도 1942년 10월 1일 자택에서 검거되어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 수감되었다.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그도 동지들과 함께 일제 형사들로부터 비행기 태우기, 물 먹이기와 같은 악독한 고문을 받았고, 수시로 구타를 당하였다.

1944년 9월 30일 나까노 도라노 예심판사는 최현배에게 개정치안유지법의 제1조의 결사 조직죄를 적용하였고, 공판에 회부하였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의 재판부(니시다(西田勝吳) 판사)는 예심종결에 의거하여 최현배에게 징역 4년형을 언도하였다.

함흥감옥 시절 그는 어떻게 해서든 생존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콩밥 한 덩어리를 받아 이것을 조금씩 떼어 먹었는데, 밥 한 조각을 팔십 번에서 일백 육십 번까지 씹어 먹어 영양을 유지하였다. 반이나 썩은 사과를 먹을 때도 그 씨까지 씹어 먹었다. 생선 명태의 머리를 얻어먹게 될 때에도 모든 뼈까지 전부 먹었다고 한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한글 가로글씨체를 연구하고 완성하여, 민족의 해방에 대비하였다.

일제의 재판 판결에 불복하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1945년 1월 18일에 서울에 있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일제의 고등법원은 같은 해 8월 13일에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하였다. <소화이십년 형상(刑上) 제59호 판결>이 일제가 남긴 조선어학회 사건의 최종 판결문이다.

일제 재판장은 조선어학회의 ‘언어투쟁도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피고인 이극로, 최현배 같은 자는 조선 안에서 쟁쟁한 민족주의자다.”라고 규정하면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이 여전히 농후한 민족의식을 품고 있는 중대악질이고, 조선어학회의 어문운동이 10여 년 동안 조선사회에 극히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에 맞서, 조선어를 영구히 유지하여 우리 민족과 민족성을 보전하는 언어독립투쟁 즉 항일 투쟁을 전개하자, 일제는 혹독하게 탄압하였던 것이다.

최현배는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여 석방되었다. 약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의 국어정책 수립과 한글전용운동 전개

해방 뒤 그는 이극로와 함께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앞장섰다. 13대(1945-1946) 조선어학회의 간사를, 14대(1946)와 15대(1946, 9, 9-1949, 9, 25)까지 조선어학회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47년 <조선말큰사전>(1권)을 발간하였는데, 이 사전의 문법 체계도 최현배가 지은 <우리말본>(1937)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1949년 3월 재단법인 ‘한글집’이 창립되었을 때, 고향의 전답 12,970평을 여기에 기부하였다. 1949년 9월 25일 조선어학회의 정기총회 때 최현배가 이사로 선임되었다. 다음 날 이사회는 그를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그가 한글학회(조선어학회의 후신)를 이끌어갔다. 1953년 5월에서 1970년 3월 23일 서거할 때까지 한글학회 이사장에 선임되어 헌신하였다.

최현배의 업적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미군정에 참여하여 국어 정책을 수립하였다. 1945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에 재임하여 여러 정책을 입안하였다. 조선교육심의회의 제9분과 교과서위원회의 위원장인 최현배는 국가의 공문서와 교과서를 한글 전용으로 사용하고, 가로쓰기를 실천하는 안건을 심의회의 전체회의에 상정하여 하여, 통과시켰다. 한글전용과 우리글 가로쓰기 주장은 1988년 한겨레신문이 실천하면서,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하였다.

아울러 국어교원의 양성과 각종 교과서의 편찬에 기여하였다. 1948년에서 1950년까지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세종중등 국어교사 양성소의 교수로 참여하였다. 또 일본어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 때문에 일본어의 잔재가 그나마 신속히 청산될 수 있었다. 한자 사용의 폐지를 위해 <글자의 혁명>(1947)을 발행하여 보급하였다.

둘째로, 한글학회의 이사장 시기에, <조선말큰사전>(1957)의 간행을 완성하였다.

셋째로, 한글전용운동의 전개에 매진하였다. 그는 전 국민의 문자 생활을 한글로만 쓰도록 하려고 국회에 이를 제안하여 국회로 하여금 ‘한글 전용법’(1948)을 제정하게 하였다. 한글 전용법은 대한민국 국민의 문자 생활의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인 법률이었다. 1949년 5월 한글전용촉진회를 조직하였고, 그 위원장에 선임되어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한글 전용 주장은 박정희 정권의 국어정책에 반영되었다. 한글 나라의 실현은 그의 서거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넷째로, 1962년 한글학회 부설로 ‘한글 기계화 연구소’를 조직하여, 소장에 취임하였다. 한글 타자기의 글자판 통일에도 앞장섰다.

한편 그는 1951년 1월에서 1954년 1월까지 문교부 편수국장에 다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대통령 이승만이 독단적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철폐하는 ‘한글 간소화 문제’를 추진하자, 여기에 반대하여 편수국장직을 사임하였다. 한글 간소화 안에 대해 비판하는 글과 한글학회 성명서를 발표하여, 대통령의 주장을 철회시켰다.

1954년 4월 연세대 교수로 다시 취임하였다. 1955년 4월에서 1960년 9월까지 연세대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56년 세종대왕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을 때 부회장과 대표이사로 선임되었다. 1962년 한글전용 특별심의회 부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70년 3월 23일 서거하였다.


민족사에 남긴 교훈

최현배의 좌우명은 “한글이 목숨”이었다. 그 스스로 ‘등 뒤엔 반만년 역사를 지고 앞에는 무궁한 장래를 가진 조선겨레의 한 사람으로서’(<우리말본>첫째매, 1929, 「머리말」)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쉼 없이 <글자의 혁명>(1947), <중등 조선 말본>(초급)(1948),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1951), <한글의 투쟁>(1954), <나라사랑의 길>(1958), <나라 건지는 교육>(1963), <외솔 고희 기념논문집>(1968), <한글만 쓰기의 주장>(유고, 1970) 등과 같은 저서를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각각 수여하였다.
▲ 외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건국공로 훈장
▲ 외솔기념관에 전시돼 있는 건국공로 훈장
 
최현배는 일생을 우리 말글의 연구와 보급에 바쳤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국어학자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해방 후 독재정치를 비판한 사회사상가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다. 부조리한 현실의 개혁을 위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의 학문에는 실천성이 담보되어 있었다. 그의 저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의 산물이었다. <우리말본>과 <한글갈> 등 수많은 우리 말글 연구는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대항하고자 나왔다. <나라사랑의 길>과 <나라 건지는 교육>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한국 교육계의 부패를 비판하면서, 이의 타개책을 제시하였다. 진실로 그는 우리 민족의 선지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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