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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상하이 157] 풍금이 있던 자리

[2022-09-09, 06:56:41] 상하이저널
신경숙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신경숙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여성적 글쓰기>라는 단원에서 해당 작품을 처음 접했다. 

말 줄임표, 한숨 소리, 단어의 반복, 연상에 의한 이야기 전개 등이 이 글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특징이라 배웠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런 특징들에 굳이 ‘여성성’이라는 라벨을 붙이는 게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그때도 지금도 좀 더 따져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우선은 단순하게나마 감각적이고 세밀한 심리묘사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쯤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글은 불륜을 저지른 주인공이 불륜 상대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공이 7살 되던 해, 어느 날 아버지가 데려온 늦봄 볕같이 뽀얀 여자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농사일로 햇볕에 검게 그을려 주름 마디마디마다 땟국물이 흐르는 강퍅한 어머니,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노란 병아리색을 닮은 햇살같이 환한 여자 사이에서 주인공은 어지러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역시 감각은 기억을 더 깊게 지배하나 보다. 거진 10년도 더 전에 읽은 글임에도, 줄거리보다도 그 여자가 만들어준 음식들, 그 여자의 차림새, 그 여자가 풍기던 냄새에 대한 선명한 묘사들이 나의 이 소설에 대한 기억을 대신해왔다. 큰오빠의 도시락 볶음밥을 칙칙 볶는 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고, 색색의 고명을 올린 도시락과 조물조물 무쳐낸 나물과 둥그렇게 빚어낸 주먹밥이 글을 읽고 있음에도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아 고향의 음식에 대한 향수를 한껏 자극하기도 한다. 

그렇게 오감으로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빠르게 사로잡았던 그 여자는 어머니가 다시 집에 잠시 왔다 돌아간 그 다음 날 떠나간다. 어머니의 등장과 몇 가지 행동들은 강렬하지 않지만 자연스럽다. 퉁퉁 불어 힘줄이 불끈 솟은 젖을 막내 동생에게 물리고는 주인공의 엇갈린 단추를 풀어 다시 제대로 잠가주고, 주인공 고무신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다시 돌아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그 여자는 어떠한 강렬한 자극과 의지로도 거스를 수 없는 삶의 이치와 제자리가 있다는 것을 순간 보았던 것이다.

주인공 또한 그 기억에서 자기 삶이 세워진 토대가 그 여자가 떠난 후 다시 찾아온 가정의 평온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을 힘겹게 상기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감각과 감정은 폭발적이고 깊은 흔적을 남기지만, 우리 삶은 결코 그것이 다가 아님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힘겨울 것이다. 마을의 까치와 숲 속의 나무들이 겨울을 보내고 봄에 다시 잎을 피우고 점점 더 색을 짙게 내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생의 근원은 결국 한순간의 불꽃과 같은 열정이 아닌, 오랜 시간에 걸쳐 순리대로 흐르는 자연과 닿아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제야 비로소 글 서두에 공작새와 코끼리거북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김태람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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