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7일 수요일 뮤링정담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택시 창문 옆 움푹 파인 공간. 그곳에 핸드폰을 넣어두고 차에서 내린 것이다. 다행히 태블릿에 위챗과 DiDi 미니프로그램이 있어 택시 번호판과 안내센터 번호는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내가 중국어로 통화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푸근한 인상의 택시 기사님이 떠올랐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그저 웃기만 했던 나에게 친절하게 고개를 끄덕이시던 그분. 그분과 자주 마주쳤던 나는 친근해서 방심했던 걸까. 그날 무심코 놓고 내린 핸드폰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이틀 동안 나는 끝없이 자책의 구덩이로 빠져들었다. 핸드폰이 없으면 언제 계정이 막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핸드폰 없이 살 수 있을까? 거지도 QR로 적선을 구하는 나라 아닌가?! 결국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중국어 한마디 못 하는 나와 그들 사이에서 친구는 소중한 시간을 할애해 줬다. 안내 직원은 장담할 수 없다고 했고, 기사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대와 불안이 범벅이었다.
마침내, 포기하지 않아 준 친구 덕에 나는 5일 만에 핸드폰과 재회할 수 있었다. 집 앞까지 전해주러 오신 기사님이 열정적으로 말을 건넸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후에 친구가 전해준 그분의 말은 이랬다.
“외국인들이 중국도 안전하고 따뜻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당위로서가 아닌 의미를 구현하고자 했다는 것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나는 그 동안 내 행동과 선택 속에서 어떤 마음을 표현하며 살아왔을까? 그런 마음들이 나를 어떤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발견하고도 돈으로 바꿀 수 있다. 물질이 그 사람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믿거나, 돈이 자신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준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 또한, 가족과 생존이 중요하다고 믿는 경우에 더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상은 주로 ‘돈’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보상을 물질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을 다르게 표현하고자 할 때, 그것이 상대방에게 제대로 공감되지 않으면 오히려 애매해진다.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은 물질적 교환가치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물질적 교환가치만을 중시한다면, 우리의 존재 의미나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활동은 쉽게 위축될 수 있다. 이는 마치 ‘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몸의 아픔만이 전부라고 여기거나, 고통이 몸에서 시작되었다고 믿게끔 되는 상황과도 비슷하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발견하고도 지나쳤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은 그것을 통한 별다른 마음이 없다는 표현을 하는 셈이다. 삶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그와 비슷하게 다뤄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그 어려움을 끝까지 해결해 주고 싶은 친구의 ‘마음’을 만났고, 자국민의 따뜻함을 알리고자 했던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며, 내가 기억해야 할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다.
나의 마음과 선택이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는 것. 그렇게 세상의 한 줄 세우기에서 자유로워지고, 각자 고유한 색을 간직하며 살 수 있다. 동시에 이런 마음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뮤약사(pharmtend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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