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나라도 못 없앤다는 말이 있다. 여기엔 가난과 가난한 사람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가난의 원인을 게으름이나 무능력함에 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으로 부유함을 부지런함이나 유능함의 당연한 귀결로 보는 것 즉 가난을 자연의 상태로 본다는 뜻이다. 과연 가난과 부귀를 자연스런, 즉 원래적인 것으로만 볼 수 있을까. 참 쉽지 않은 물음이다. 세상 만사를 간편하게 이것 혹은 저것으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여기에는 개인적이고도 사회적인, 또한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문제들이 모두 얽혀있을 것이다.
며칠 전 모 신문사의 신년특집 기사 중 걸인의 하루를 직접 체험하며 쓴 것을 보았다. 기자가 경험한 하루는 당초 예상대로 그저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부지런히 정보를 수집하고 여기 저기를 찾아 다니며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우리 사회의 여느 곳과 다름없는 경쟁과 고단한 노동으로 채워졌다. 우선 꼭두새벽 무료 급식하는 곳에서 한 끼를 해결하고 특정 요일이나 정해진 시간에 자선을 베푸는 종교 단체나 기관을 찾아 바삐 움직여야 했는데 물론 그런 곳에 대한 정보는 절대로 서로 공유하지 않는다.
기자의 동행을 허락한 60대 노인은 낯선 사람에게 동정을 구하는 것보다 그렇게 발품을 파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했단다. 그렇게 한 나절을 보낸 기자는 드디어 서울역 지하도 입구 바닥에 엎드렸는데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고 한다. 음료수, 적선금 등 시민들의 온정은 바닥의 찬 기운과 수치심을 온 몸으로 견딘 몇 시간의 노동에 대한 대가라고 해야 할 만큼 그 일이 결코 녹녹치 않더라고 했다. 이 기사를 보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이유, 삶의 내용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상해 연합교회 입구엔 일요일 아침마다 고정적으로 찾아오는 걸인들이 있다.
몇 년 전 어떤 분이 고향으로 돌아갈 경비를 지원하겠다고 했더니 거절하더라는 말을 듣고 그 분들에 대한 불신이 생겨 눈을 마주치지 않고 외면하고 있던 터다. 또 간간이 중국의 걸인부자들 이야기를 듣고는 도로 가에서 운전자들에게 적선을 구하는 노인네나 애업은 아줌마를 볼 때마다 그 초라한 행색에도 망설이다 늘 그냥 지나치곤 했다. 그들이 그렇게 길거리에 나오게 된 배경과 현재의 상황, 마음의 동기가 어떤 것인가에 막연한 의혹의 시선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의혹의 눈길을 거두기로 했다. 그들의 삶을 현실을 살아가는 생존 방식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한국의 그 어느 노인처럼 발품을 팔면서 혹은 길거리에서 하루 종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수치심, 모멸감 따윈 무감각이라는 자존심으로 막아내며 살아가는 그 분들이야말로 우리 안에서 편안히 살아가는 한 마리 양을 위해 길에서 헤매며 이 시대를 온 몸으로 고발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그 분들에게 단 몇 푼이라도 정중하게 건네 드리려고 한다. 우리의 인간성에 경종을 울려주는 그 힘겨운 노동의 대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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