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메뉴

상하이방은 상하이 최대의 한인 포털사이트입니다.

[상하이의 사랑법 11] 사랑, 목숨이 다할 때까지 _ 징안(静安)공원

[2024-03-26, 10:57:35] 상하이저널
 

호화로운 백화점과 호텔, 오피스 빌딩 숲 사이에 홀로 고즈넉한 초록빛공원. 나뭇잎 무성한 플라타너스 가로수며, 연초록빛 넓은 잔디밭, 기묘한 모양의 바위와 돌들, 작은 동굴, 호숫가에는 이국적 음식을 제공하는 레스토랑까지, 징안공원에 들어서자 잠시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산책길을 따라 죽 놓여 있는 벤치에 노인들이 삼삼오오 앉아 있다. 이제 막 카페들이 문을 열기 시작하고 오피스 빌딩 안에서 사람들이 곧 업무를 시작하려는 이른 아침, 공원 안 벤치는 이미 만원이다. 미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노인들이 벤치 주변을 서성인다.


대화하다 간혹 큰 소리로 웃는 노인들. 벤치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느질을 하는 할머니. 가져온 보온병을 들고 후후 불어가며 차를 마시는 노인들. 아침 댓바람부터공원으로 밀려 나온 저 노인들의 마음은 정말 표정처럼 평온할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내가 이미 노인들은 불행하다고 단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초록색 나뭇잎보다 가을바람에 바닥을 뒹구는 낙엽을 더 아름답다고 느끼면서도, 인간의 노년만은 불쾌하고 추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음악이 들려온다. 경쾌한 음악을 틀어놓고 칼춤이나 부채춤을 추는 노인들, 남녀가 짝을 이뤄 사교춤을 추는 노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춤사위를 넋 놓고 바라보다 한갓진 곳에 나란히 앉아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보행기에 앉은 두 노인은 나직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세상을 등진 채 덩그마니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애틋해 따스한 봄바람이 분다.


요즘 나는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책장을 덮곤 했다.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랑 이야기를 읽고 또 겪었기 때문일까. 빤한 결말을 너무 쉽게 짐작했다. 아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근력과 체력이 다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이 먼저 폭삭 늙어버린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신은 나이와 함께 망각을 선물해 주는지 모른다. 이미 알아버린 사랑 이야기의 패턴 같은 건 잊으라고. 마치 생전 처음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이라고는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시 설레라고.


알록달록하고 폭신한 솜사탕 같은사랑 대신 볼품은 좀 없어도 탱글탱글 잘 익은 알밤처럼 단단한 것들을 주워 모은다. 혹여나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들까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잠자리에 들어오는 남편이 내는 사각사각 소리, 잠든 내 이마에 살짝 갖다 댄 그 입술의 온기 같은 것. 늦은 오후 따뜻한 차 한 잔에 어울리는 티푸드는 화려한 케이크만이 아니다. 약과나 고구마도 달콤하고 든든하다. 사랑이 끝난 게 아니었다. 모양과 빛깔이 좀 달라졌을 뿐. 

“언제까지 이 빌어먹을 왕복 여행을 계속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플로렌티노 아리사에게는 53년 7개월 11일의 낮과 밤 동안 준비해 온 대답이 있었다. 그는 말했다.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

윤소희 작가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위챗: @m istydio, 브런치스토리 @yoonsohee0316)
master@shanghaibang.com    [윤소희칼럼 더보기]

플러스광고

[관련기사]

전체의견 수 0

댓글 등록 폼

비밀로 하기

등록

가장 많이 본 뉴스

종합

  1. 中 하늘 나는 ‘eVTOL’ 상용화에..
  2. 샤오미, 3분기 매출 17조…역대 최..
  3. 中, 한국 무비자 체류 기간 15일..
  4. 상하이 심플리타이, 줄폐업에 대표 ‘..
  5. 2025 상하이 미슐랭 53곳 선정...
  6. 中 세계 최초 폴더블폰 개발사 로우위..
  7. 상해흥사단, 과거와 현재의 공존 '난..
  8. 상해한국상회 회장 선거 12년만에 ‘..
  9. 유심칩 교체 문자, 진짜일까 피싱일까..
  10. 中 연간 택배 물량 사상 최대 ‘15..

경제

  1. 中 하늘 나는 ‘eVTOL’ 상용화에..
  2. 샤오미, 3분기 매출 17조…역대 최..
  3. 中, 한국 무비자 체류 기간 15일..
  4. 中 세계 최초 폴더블폰 개발사 로우위..
  5. 中 연간 택배 물량 사상 최대 ‘15..
  6. 중국 게임 '오공' 게임계 오스카상..
  7. 스타벅스, 중국사업 지분 매각설에 “..
  8. 콰이쇼우, 3분기 이용자 수 4억 명..
  9. 골드만삭스 “트럼프, 대중국 실질 관..
  10. 상하이 부동산 시장 활황, 11월 중..

사회

  1. 상하이 심플리타이, 줄폐업에 대표 ‘..
  2. 상해한국상회 회장 선거 12년만에 ‘..
  3. 유심칩 교체 문자, 진짜일까 피싱일까..
  4. 초등학생 폭행한 경찰에 中 누리꾼 ‘..
  5. 上海 아파트 상가에 ‘펫 장례식장’..
  6. 상하이 디즈니랜드, ‘전동 휠체어’..
  7. 中 가짜 다운재킷 7만벌 적발… 거위..
  8. 상하이의 아름다운 밤하늘 누비는 ‘헬..

문화

  1. [책읽는 상하이 259] 사건
  2. [책읽는 상하이 260] 앵무새 죽이..
  3. 상하이 북코리아 ‘한강’ 작품 8권..
  4. [신간안내] 상하이희망도서관 2024..

오피니언

  1. [인물열전 2] 중국 최고의 문장 고..
  2. [무역협회] 미국의 對中 기술 제재가..
  3. [허스토리 in 상하이] 상하이 한인..
  4. 상해흥사단, 과거와 현재의 공존 '난..
  5. [허스토리 in 상하이] 당신은 무엇..
  6. [박물관 리터러시 ②] ‘고려’의 흔..
  7. [허스토리 in 상하이] 떠나요 둘이..
  8. [안나의 상하이 이야기 16] 차가운..
  9. [상하이의 사랑법 19] 사랑은 맞춤..
  10. [무역협회] 기술 강국의 독주? AI..

프리미엄광고

ad

플러스업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