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작가서점. 계단을 오르는 내내 온실처럼 둘러싼 유리창으로 따스한 햇볕이 스며들어 왔다. 빛은 마치 공간 전체를 감싸는 얇은 금빛 베일 같았다. 서점은 중국 고서부터 사진,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 가득 차 있었고, 빈티지 소품과 앤티크 가구로 아늑한 분위기를 더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작가와의 만남, 문학 강연, 신간 발표회는 이곳을 단순한 서점이 아닌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만들어 준다.
서가 사이를 거닐다가 관심이 가는 책 한 권을 들어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다 문득 궁금해졌다. 작가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기억을 더듬으며 여러 작가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던 중, 얼마 전 읽은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시 ‘죄와 벌’에서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라는 구절로 사랑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성性’에서는 자신이 외도 후 아내와 잠자리하는 장면을 담담하게 그렸다.
모호하게 표현했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내용인데, 자신을 정확히 지목해 쓴 시들을 그녀는 어떻게 견뎠을까. 그녀는 단지 감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김수영 시인의 사후, 미발표된 시들을 발견한 그녀가 직접 그 시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아내로서는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이 시를 공개하기로 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 어떠랴. 살아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가 더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수모와 치욕도 달게 받을 수 있다.”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중)
그녀의 담담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는 한 인간의 본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용기와 신뢰였다. 시인의 연인이자 아내로서 그녀는 단순히 곁에서 함께한 존재를 넘어, 그를 깊이 이해하고 작품의 탄생을 돕는 뮤즈이자 동지였다. 자기 작품을 쓰지 않았다 해도 그녀 자신이 시인이자 예술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후의 햇빛이 창을 통해 부드럽게 스며들어 책장과 책등을 비췄다. 빛은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와 함께 공간을 따스한 금빛으로 물들였다. 손가락 끝으로 책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 너머에 또 얼마나 다채로운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작가들의 연인이자 뮤즈였던, 그러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예술가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작가들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들의 창작을 관통하고 세계관을 흔들며 작품 속에 녹아드는 생명력이다. 때로는 사랑 자체가 작품이 되고, 때로는 사랑의 부재와 상실이 강렬한 영감을 불어넣기도 한다. 사랑은 작가들이 가장 진실한 자신과 마주하도록 이끈다.
책을 덮고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작가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내 안에 메아리쳤다. 나는 시인처럼 내 사랑을 온전히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랑이 나를 온전히 드러내도록 허락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나는 창문 너머 빛이 비추는 곳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