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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병률’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

[2024-07-15, 12:39:02] 상하이저널
최근 시집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한 적’ 펴낸 이병률 시인 상하이 방문
 
혼자 여행을 하고 시를 쓰고 산문을 쓴다. 라디오 음악 방송작가로 18년간 매일 써왔다. 대학 학보사에서 익힌 사진도 프로페셔널이다. 심야 음악방송 DJ 톤의 오디오 북 또한 인기다. 시도 쓰고, 산문도 쓰고, 사진도 찍고, 낭독도 하고, 직접 출판까지 한다. 

200만 부의 작가, 감성장인, 문단계의 오빠….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병률 시인(56), 요즘 누가 시를 읽나 싶은데 그의 시집은 10만 부씩 팔린다. 감성적인 문장과 사진으로 100만 부를 넘긴 여행산문집은 출판계에 새 지평을 열었다. 여행산문집의 폭발적 인기에 시인의 정체성을 묻기도 한다. 시인과 여행작가의 경계, 어디쯤 서 있는지. 하지만 시인은 이 물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2003년 첫 시집 이후 꾸준히 '률며든' 독자들도 딱히 경계를 긋지 않는다. 그냥 이전에 없던 "이병률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일 뿐"이다. 

이병률 시인이 최근작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한 적>을 들고 상하이에 나타났다. 공식 일정을 마친 지난 1일 판위루(番禺路) ‘콜롬비아 서클’에서 시인을 만났다. 100년 전 조계지의 경계를 넘어선 서양인들이 당시 콜롬비아루(哥伦比亚路, 지금의 판위루)를 개발해 만든 ‘콜롬비아 서클’. 1920년대 ‘중국’ 땅 ‘프랑스’ 조계지에 ‘헝가리’ 건축가가 설계한 ‘스페인’ 양식의 건축물, 당시 ‘미국’ 교민들과 미해군들의 사교 장소였던 이곳에 지금은 ‘일본’ 츠타야 서점이 들어섰다. 화려함 뒤 아픈 역사까지 작가적 상상력이 충만한 곳에서, 시인과 여행작가의 경계 그리고 중국에서 썼던 작품 얘기를 나눴다. 

[사진=이병률 시인]

시와 여행산문 사이

여행산문 인기에 작가의 좋은 시들이 가려진 것 아닌지 아쉬움을 전했다. 
“그런 이유로 7~8년전부터 좀 더 독자들 앞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 작가로 불려주는데 굳이 앞에 나가려고 하는 것은 시도 씁니다, 시인입니다, 제 시 한번 들어 보시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지난달 29일 상하이 북콘서트에서도 시와 여행 얘기를 나누고, 자신의 시 뿐 아니라 한국 작가들의 시를 직접 낭독했다. “시인으로서 역할을 하면서 제 시를 읽어 주는 분들도 많이 생겼다”고 덧붙인다.  

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

이병률의 많은 시들이 여행지에서 탄생한다. 140여 나라를 다닌 작가가 여행산문을 쓰는 것에 의외성은 없다. 그런데 시를 쓰겠다고 작정하고 떠나는 시인의 여행은 특별해 보인다. 소설가가 자료조사와 취재를 위해 떠나듯, 그는 시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독자들은 본질인 시보다 여행산문에 방점을 찍는 것 같다. 시집보다 판매부수가 10배 이상 높은 여행산문집에 시인의 고민이 궁금했다. 

“시인으로서의 고민도, 여행작가로서 고민도 없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한 여행이 결국은 여행산문이나 시로 다 나올 것이고, 두 가지 모두의 잠재적인 날개가 여행 안에 있기 때문에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여행산문도 과한 대접을 받고 있고, 시집도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50만 부, 100만 부를 기록한 여행산문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을 뿐, 실제 <바다는 잘 있습니다(2017)>는 12만 부 넘게 팔렸다. 독자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그는 시인과 여행작가 중 무엇으로 불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인가, 잠재적인 두 날개를 어떻게 잘 펼칠 것인가를 생각한다. 그는 이어 “쉽지 않은 세상에 왜 어려운 장르로 어필하는지”를 궁금해한다면 “이병률 가슴에 시가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 들려주고 싶고, “시를 쓸 때 비로소 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

생선 가시를 발라 움푹한 접시 주변에 기대어 놓는다/살이 발린 가시는 ‘시’라는 글자가 되어 침착하게 서 있다/저 가시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접시에 옮기다 흘리지 않고/저렇게 시로 버티고 있는 것이 대견하다/어느 날 아는 뭔가에 물렸던 것이다/그 뭔가가 철저히 시였고/시는 독을 흘리는 이빨인 채로 박혀/지금까지 빠지지 않는 것이고/이로써 내 경력은/뭔가를 잡으려/손을 깊게 넣고 있었던 것 - ‘경력서’

시가 안 써진 적

그렇다면 슬럼프는 없었을까? 어떤 시인은 ‘시가 안 써지면 시내버스를 탄다’는데, 이병률 시인은 글이 안 써진 적도 없다고 한다. 

“18년 동안 방송작가로 매일 원고를 써와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 강박이 있으니 민첩하게 써내야 한다. 출판사나 매체에 원고 약속이 돼있는 날 써야 될 때도 있지만, 항상 몇 줄씩은 넣어가지고 다닌다.” 라디오 키드인 그는 이소라, 신해철, 유희열 등이 진행하는 FM음악방송 작가로 18년 동안 매일 써왔던 내공과 여전히 그 안에 무언가 쓰고 싶어하는 목마름이 있어서 가능한 일인 듯 하다.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

시가 안 써진 적도, 시인으로서 고민도 없다고 한 그에게 시를 읽지 않는 요즘 독자들에 대한 고민을 물었다. 그의 말 대로 쉽지 않은 세상에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는 묘하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경우 3년 전에 이별에 푹 젖었던, 사랑의 뒷맛을 느끼면서 끙끙 앓았던 그때의 맛과, 그 이별에서 떠나 있는 지금의 맛과는 다르다. 시는 그런 것 같다. 그때는 절절해서 읽었는데 지금은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것. 시의 힘인 것 같다. 내가 어떤 색깔을 가지고 태어난 것 같은데, 그 색깔을 더 진하게 만들어 준다. 화학용액을 떨어뜨린 것처럼 시는 나 자신이 진해지는 그런 역할을 한다.” 한 인문학 강연에서 그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시는 사람을 물들이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최근작의 표제시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도 여행가방이 터진 것처럼 그 문장이 술술 터졌다. 출판사에서 제의를 받고 곧바로 눈이 많이 오는 홋카이도로 떠났다. 
“눈을 워낙 좋아한다. 눈은 나의 종교 같다.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내리는 눈을 보니 시를 많이 쓰겠구나 생각했다. 역시 그랬다. 그 전에 쓰고 싶었던 시들도 눈이 오는 창가에 앉으면 저절로 터졌다.” 그리고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만났던 친구, 잊는데 오래 걸렸던 사람, 언제나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지 하고 떠올리는데, 시가 저절로 왔다. 그 문장이 술술 터졌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시들어 죽어가는 식물 앞에서 주책맞게도 배고파한 적/기차역에서 울어본 적/이 감정은 병이어서 조롱받는다 하더라도/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던 적/매일매일 햇살이 짧고 당신이 부족했던 적/이렇게 어디까지 좋아도 될까 싶어/자격을 떠올렸던 적/한 사람을 모방하고 열렬히 동경했던 적/나를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고/내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조차 상실한 적/마침내 당신과 떠나간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을 영원을 붙잡았던 적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사진=시집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2024년 4월)]

‘만두 빚는 시간’ 상하이 식당

그의 시에는 중국이 가끔 등장한다. ‘만두 빚는 시간’의 상하이, ‘장도열차’의 란저우, 이번 시집에는 칭다오 기차역과 중국 봉쇄가 들어 있다. 
그는 2016년 가을, 40일 정도 상하이에 머물렀다. 우연히 알게 된 형의 소개로 상하이대학 안에 있는 식당에서 일했다고 한다. 근처 아파트에 살면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고 현지인들과 직장동료가 되어 일터인 주방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시로 들려준다. 헤어지면서 참았던 감정을 ‘만두를 빚는 시간’에 꾹 눌러 썼다. 

중국식당 주방에는 의자가 없었지/누구도 앉지를 않았으니까/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유일하게 밀가루 포대/나는 만두 빚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지/시간을 뚝뚝 잘라 밀대로 밀고/시간을 푹푹 퍼서 손바닥만한 세계에 담는 시간/주방에서 막일을 하는 나였는데/내가 떠나야 할 날에는/당신이 나에게 자꾸 뭐라 그랬지/난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한자로 써달라고 했는데/당신이 작업대 위에/하얗게 밀가루를 뿌리고 이렇게 썼지/가지마요, 안 가면 안되나요/눈빛을 교환하면 안 될 것 같아/그 시간을 툭 잘라버리고 싶은데/어딘가에 좀 앉아야했는데/그러지 않으면 힘이 풀려 터져버린 세계가/와르르 쏟아져버릴 것 같은데/상해 중국식당 주방에는 정말이지 의자가 없었지 - ‘만두 빚는 시간’

‘기차는 칭다오역에서 출발한다’

작년 8월 칭다오에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이병률 시인의 이번 상하이 방문을 연결해준 고마운 행사다. 강연 일정을 마치고 그는 시를 찾아 칭다오 기차역으로 갔다. 시를 쓸 수 있는 3~4시간 거리의 목적지를 골라 표를 샀다. 랴오청(聊城), 어차피 여행이 목적이 아닌 시인에게 랴오청에 대한 정보는 무의미하다. 쓰기 위한 목적의 여행길에서 시적인 화면이 시인 앞에 펼쳐진다. 아픈 아들과 노모가 기차를 탔고, ‘기차는 칭다오에서 출발한다’ 시가 나왔다. 시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노모와 청년도 랴오청에서 함께 내렸다고 한다. 

기차표가 없었는지 모자母子에게 자리는 하나뿐이다/듬직한 어른인 아들은 얼핏 봐도 아프다/노모가 보온병을 건네고 과자를 건네보지만/또 삶은 달걀을 건네도 아들은 싫다는 내색을 한다/아들은 무언가에 상체를 심하게 받친 듯하다/기차가 어느 역에 멈추고/어머니가 앉아 있던 자리에 새로 탄 사람이 와서/이제 어머니는 서 있어야 한다/집에 가는 길이 멀다 –‘기차는 칭다오에서 출발한다’ 중

중국 40곳 여행, 편안한 나라

이병률 시인은 25년 전 처음 중국 여행을 시작해 40여개 지역을 다녔다고 한다. 많은 인연 덕에 중국은 참 편한 나라가 됐다는 그는 특히 상하이는 조카가 유학을 해서 몇 번 왔었고, 식당에서 일하면서 일상을 보냈던 곳이기 때문에 더욱 친근하다고 한다. 

“루쉰공원을 걸으면 너무 아름다웠다. 춤추고 연주하고 글씨 쓰는 모두가 이해됐다. 8시 출근하면서 만나는 덜 씻는 듯한 외모도 예뻐 보이고, 밀고 몰려들고 툭툭 치고 다니는 데도 저절로 이해가 되고, 사람이 막 쏟아져 나오면 소나기가 내려서 속이 시원해지는 듯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조카와 갔던 식당 상해인(上海人), 이 말도 너무 예뻤다.”

오래 전부터 상하이에 살고 있었던 사람처럼 대화에 섞여 나오는 시내 곳곳 지명들이 자연스럽다. ‘길 위의 시인’답게 그는 강연 당일에도 도쿄에서 홍차오공항으로 날아왔다. 공식일정을 마치고 3~4일을 더 머물다 갈 것이라고 한다. 상하이 사진이 들어간 이병률의 여행산문과 시를 상상해본다. 그는 이번 상하이 여행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병률 시인은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바다는 잘 있습니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등을 펴냈다.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등 여행산문집 3부작이 널리 알려졌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안도현, 나희덕, 김수영, 문태준 시인 등과 함께 ‘시힘’ 동인이다. 현재 문학동네 출판그룹의 계열사 ‘달’ 출판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 

고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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