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한계점, 최대치를 이야기할 때 ‘마지노선’이라는 단어를 쓴다. 마지노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방어 요새였다. 10년 동안 160억 프랑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과 최고의 건축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어 졌으며 전투뿐만 아니라 장기전에 대비한 보급품, 지하 철도망까지 갖춘 최고의 요새였다.
하지만 독일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를 함락시키면서 실전에서 사용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을 의미하며 나의 일상 생활에도 종종 떠오르는 이 단어가 요즘 떠오른다. 대학 입시를 위해 7월 출사표를 던지고 한국에 갔던 지인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합격 여부를 묻기가 조심스러운 게 올 해 입시였던 듯 하다.
가까운 지인들의 경험담과 조언 속에서 견고한 마지노선의 승리담 보다는 그 마지노선을 후퇴시키고 무너졌던 일들의 고백이 남 일 같지 않다.
나의 일상 생활에서도 틈틈이 발생한다. 초중고등 자녀를 둔 엄마로 아이가 여기까지는 하고 정해 놓은 성적을 유지해 주기 바라지만 내 마음 속에 있던 그 선을 넘을 때, 회사를 운영하다가 고전하는 가운데 그래도 최소한 이 정도 생활비만은 하지만 그 최소한의 선을 넘어설 때, 내가, 또는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플 때 절대 중한 병은 아니길 바라지만 내가 생각한 이상의 선을 넘어선 질병일 때, 정치, 경제, 사회에 최소한 이정도만은 지켜지길 바라지만 그 최소한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직시할 때 나의 마지노선은 힘 없이, 괴롭게 무너진다.
누군가는 상식이라는 선에서 마지노선을 정해 놓기도 하고, 누군가는 거기에 좀 더 보태어 욕심과 노력이라는 선에서 마지노선을 정해 놓는다. 그 선을 흔들림 없이 지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자는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라 표현할지도 모른다. 42.195km를 달리는 마라토너가 경기 도중 갑자기 심장에 이상이 올 때 계속 달려야 하는가?
마라톤 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위해 그 마라토너는 경기를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나는 ‘올바른 포기’라 칭한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을 위해 나의 선을 포기한 것은 결코 실패가 아님을 40대에서야 여유 있게 보게 된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지켜져야 할, 절대 무너지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은 분명 포기하지 말하야 할 영역이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알게 모르게 개인적으로 거미줄처럼 정해 놓은 수많은 마지노선들 속에서 스스로를,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게 된다.
오늘 내가 포기한 마지노선 때문에 힘들어 하는 나에게 격려를 해 본다. 한 발 전진을 위한 두 발 후퇴라고, 이게 끝이 아니고, 전부가 아니라고, 다시 휴식하고 걸을 수 있지 않느냐고. 포기한 마지노선 덕분에 배운 지혜와 경험이 또 새로운 길을 열어 가고 있다고. 입시를 치르고 온 선배 엄마들 모습 속에서 배움을 얻는다.
원하는 대학에 일찌감치 합격했다고 성공한 것도 아니요, 대기로 기다린다 하여 그들은 절대 실패자들이 아니었다. 열심히 전쟁터에서 최선을 다 해 싸우고 온 용감한 군사들이었다. 그들의 입에서 흘러 오는 경험담들 모두가 합격을 했든지, 기다리고 있든지 스스로 정해 놓은 마지노선들을 없애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또한 얼마 안 되어 나의 아이들과 입시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알게 모르게 정해 놓은 나의 마지노선이 있다면 미리 철거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안다. 철거한 나의 마지노선 뒤에 또 다른 나의 마지노선이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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