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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 상하이 227] 아버지의 해방일지

[2024-02-03, 07:23:25] 상하이저널
정지아 | 창비 | 2022년 9월
정지아 | 창비 | 2022년 9월

이 소설은 빨치산이었던 한 인물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빨치산’은 러시아어 partizan에서 나온 말이다. [적의 배후에서 통신, 교통 시설을 파괴하거나 무기나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비정규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 전후에 각지에서 활동한 공산 게릴라를 이른다. (표준국어대사전)] 

책 제목과 표지만 봤을 때는 빨치산과 관련된 책일 것이라고 눈치채지 못했었다. 아마 알았더라면 책을 펴보는데 좀 더 시간이 걸렸을 듯하다. 작가는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에게 빨치산을 주제로 한 소설임이 책의 표지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 때문이었을까? 덕분에 선입견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아버지 고상욱은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 세상을 꿈꾸며 활동했다는 이유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감옥에 수십 년 동안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그로 인한 후유증을 장애로 안고 살아야 했으며, 오랫동안 감시당하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국가에 보고해야 했다. 친척과 가족들은 연좌제로 인해 직장을 구하는 일에 제한을 받았고 빨치산의 가족이라는 주홍 글씨를 오랫동안 짊어져야 했다. 그 중에서도 고상욱의 막냇동생은 평생 형을 원망하며 알코올 중독자로 지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고아리’인데 고상욱의 딸이다. 아리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를 알아가게 된다. 아리에게 아버지는, 인간의 시원이자 사회주의의 기본이라 믿는 유물론을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신념인 민중을 위하는 일을 열렬히 실천한 행동가였지만, 농사를 책으로 짓는, 생활인으로는 젬병인 사람이었다. 그는 높은 이상을 지닌 빨치산이지만 그녀에게는 일상에 빈틈이 많은 아버지였고 그래서 고상욱의 삶이 블랙코미디 같다고 느끼는 듯했다. 그랬던 아리가 장례식장에 조문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아버지 고상욱을 재발견하게 된다. 자기가 알던 아버지가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고상의 조문객 중 한 아이는 고상욱씨와는 담배 친구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검정고시와 미용사자격 시험을 준비 중이다. 베트남인 어머니와 폭력적인 아버지, 그리고 아픈 할머니와 살고 있다. 이 아이가 담배 친구인 할배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장례식장에 온 것이다. 친구의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고상욱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는 친구라 생각되었다.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P224) 

이 부분을 읽을 때, 뜨끔했다. 나는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고민해 본 적이 있나? 하고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느 시점부터 아버지와 나 사이에 벽이 생겼는지, 나는 아버지를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나를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셨고 어떻게 표현하셨는지 상기해 보았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자고 있던 감정이 흔들렸고 얼었던 땅에 햇살이 비추어 녹아서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의 내 눈높이에서 사건을 재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다를 수 있음을 느꼈다. 이 책은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엄마가 아직 곁에 계셔 다행이다 싶다.

장례식은 죽은 자보다는 살아있는, 남은 자들을 위한 의례 같다. 죽은 자와 화해하기도 하고 작별 인사도 하면서 산 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위로하고 위로받는 장이 아닐까 싶다. 나도 올해를 기점으로 아버지의 추도식을 보내는 마음이 달라질 듯하다. 

전라도 사투리로 쓰인 이 책에 리듬을 얹어 랩하듯 읽었다. 그 생생함 때문일까?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본 기분이다. 누구 못지않게 유물론자인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사랑의 힘’을 많이 느꼈다.

최수미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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