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9년 8월 옌안에서 덩샤오핑과 결혼식을 올린 줘린 |
|
덩샤오핑(鄧小平)의 미망인인 줘린(卓林) 여사가 29일 향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0일 中新社는 중국 개혁ㆍ개방의 지도자 덩샤오핑의 미망인 줘린 여사가 베이징에서 남편 사망 12년 만에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
1997년 6월 30일 오후 줘린 여사는 중국정부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홍콩반환이라는 역사적인 의식에 참석했다. ‘1국 2체제’의 창시자 덩사오핑을 대신해, 생전에 내 나라 홍콩 땅을 밟고 싶다는 남편의 소망을 대신 이뤘다. |
신문은 고(故) 줘린 여사에 대해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으로서, 또한 중앙군사위 전 판공청 고문으로서 온갖 시련을 무릅쓰고 당과 국가에 충성을 다바쳐 온 영명한 공산주의 전사라고 추도했다.
덩샤오핑 일가는 30일 베이징의 징산허우제(景山后街) 미량쿠(米粮库) 후통(전통 골목가옥)에 영안실을 설치하고 국가 지도자를 비롯한 친지들의 조문을 받고 있다. 다만 덩샤오핑 일가와 당국은 주변 혼잡을 우려해 일반 대중에 대해서는 일단 조문을 받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줘린은 덩샤오핑의 청혼을 두번이나 거절했으나, 농공간부는 지식과 문화가 없다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깨고 덩샤오핑은 원대한 꿈이 있는 훌륭한 지식인이자 간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청혼을 허락한다.
옌안 양자링(杨家岭)의 마오쩌우둥이 거처하던 동굴집 앞에서 전우들이 모인 가운데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던 1939년은 중국 공산당이 아직 유격대로서 일본군과 국민당에 맞서 싸우던 시기였다. 줘린은 덩샤오핑의 3번째 부인이 되어 옌안을 떠나 전선으로 향했고, 그때부터 덩사오핑의 혁명의 반려자가 됐다.
줘 여사는 1966~1976년 문화혁명 기간에 덩샤오핑이 정부의 핍박을 받아 장시(江西) 난창(南昌)으로 하방됐을 때도 분신처럼 그의 곁을 지켰다.
1969년 70세에 가까운 노인이었던 덩샤오핑은 신젠현(新建县) 트랙터 수리공장에서 3년간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고된 일을 해야 했다.
줘린은 당시 월급은 없고 생활비만 겨우 되는 돈이 지급돼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해서 남편에게 변변찮은 음식을 한 번도 해 주지 못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쌀 술을 만들었는데 남편이 기뻐하면서 마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회고했다.
줘 여사는 덩샤오핑이 1978년 이후 개혁개방을 진두 지휘 했을 당시에도 여느 중국 고위 지도층의 부인들과 같이 대중들 앞에 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것이 남편이 바라던 바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덩샤오핑과 줘 여사는 5명의 자녀를 뒀으며, 대부분 자녀는 정치계와 재계, 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줘린은 쓰촨 지진 재해지역에 평생 저축해온 돈을 기부했고, 자신이 죽으면 각막은 기증하고 시신은 화장으로 강가에 뿌려 달라고 살아 생전에 유언했다.
덩샤오핑의 위대함은 80세나 되어서 나타난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하여 권력기반을 모두 잃었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은 70세가 되어서이고, 권력을 다시 잡은 것은 이후로도 몇 년이나 지나서이다. 덩의 권력의 절정은 80세가 넘어서야 이루었으며, 이때부터 개혁과 개방을 강조하고, 남순강화를 통하여 현대 중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 상하이저널(http://www.shanghaibang.net),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