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니까 그렇게 한 거야”
그때만 해도 2010년이란 새 날을 상하이에서 맞이 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1999년 7월 5일! 쑤저우(苏州)에서 8살 아들 큰 아이와 6살 작은 딸아이, 그리고 10개월 먼저 와 있던 남편과 그렇게 해외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나 저희 가족의 그간 생활을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그야말로 ‘좌충우돌 大頭父子 小頭母女’라고 이름 지으면 “아하! 맞아! 맞아!”하지 않을까 한다.
큰아이 진은 초등학교 1학년에 작은 아이 리는 유치원에 들어 가고, 저는 결혼 후 처음으로 일을 갖지 않고 자유 부인이 되었다.
그런데 자유를 외치기도 전에 학교를 정하고 보니, 집과 아주 먼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2번이나 타야 하는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결국 제가 선택한 방법은 자전거 뒤에 두 아이를 태우고 가는 것이었다.
입학한지 몇 달이 시간이 지난 어느 날 그만 학교 앞 사거리에서, 신호가 바뀌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교통 경찰이 다가 오더니 두 아이를 태우면 안 된다며 큰 아이를 내리게 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맞게 된 첫 겨울! 눈 같지도 않은 싸락눈이 내렸건만 길이 얼어 버려, 자전거 타기를 감행한 끝은 위험천만한 순간으로 다가 왔다.(그런 날 하루쯤 택시를 탈 것을……)
모퉁이를 돌다가 두 아이들은 그만 사정없이 길바닥에 떨어지고, 저 역시도 자전거와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그 뒤로도 두 아이를 태우고 꼬박 1년을 통학하고 나니, 이제는 아이들이 커버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큰 아이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작은 아이만 태우고 다니게 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우연히 알게 되어, 난리가 났다.
중국에선 5학년 이하는 혼자 자전거를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전 만약 사고가 나면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겨우 학교장의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니까 그렇게 한 거야! 지금이라면 과연 그렇게 할까?”하는 일들도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잘 데리고 다니다가, 2학년 중반이 된 후 큰 아이에게 독립심 운운하며 자전거 타고 혼자 20분 되는 거리로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가게 한 일이며, 새로운 피아노 선생님 댁에 한번 같이 가고는 그 다음 오토바이 아저씨 보고 태워 오라고 부탁했다가 결국 두 사람이 길이 어긋나 아들을 이국 땅에서 잃어 버릴뻔한 경험을 하고 만 일도 있었다.
3년의 쑤저우 생활을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보낸 후, 남편의 직장 때문에 미국 LA에서 2년을, 그리고는 다시 이 곳 중국 상해에서의 생활을 한지도 벌써 6년째로 접어 들었다.
물론 상하이서의 생활은 결혼 후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말할 만큼 소주와는 전혀 다른 혹독함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지금은 큰 지진이 발생한 후에 일어나는 여진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잘 견뎌왔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겨우 4개월 보낸 큰 아들은 벌써 11학년, 그리고 유치원 들어 가서 2주일 내내 “엄마! 가슴이 답답해!”라며 울며 교실에 들어 가기를 꺼려하던 작은 딸아이가 피아노 치며 고비를 잘 넘기고, 이제 중3이 되어 철없는 엄마 곁에서 큰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다.
아이쿠! 자꾸 지나간 세월이 생각나는 것을 보니 저도 많이 늙었나 보다.
그래도 아직도 맘은 10대인데 말이다. 이제서야 정든 상하이에서의 생활! 친구처럼 더욱 다정하게 열심히 다가가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본다.
▷안경혜(truthann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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