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라이언 오서 <사진=게티 이미지> | |
|
지난 2월 한국인들은 올림픽금메달을 목에 건 김연아를 보면서 무한한 감동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보다 더 척박할 수 없다는 피겨환경에서 김연아라는 역대 최고의 여자 스케이터가 탄생, 마침내 최정상의 자리에 서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났다'며 한국인의 숨은 저력에 새삼 놀랐고 자기 일처럼 뛸 뜻이 기뻐했다.
그런데 김연아의 성공은 혼자 힘으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의 뒤에는 어머니 박미희씨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었고 지난 2006년 7월 운명적으로 만난 브라이언 오서라는 코치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피겨계에는 하나의 정설처럼 여겨지는 말이 존재한다. 세계적인 선수가 되려면 타고난 재능은 물론 그 재능을 꽃피워줄 좋은 코치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는 거다.
이 말에 따르자면 김연아의 금메달은 그녀의 재능이 60%, 코치의 노력이 최소 30% 이상은 됐음직하다. 금메달의 나머지 30%를 채워준 장본인이 오서 코치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최근 한국인들은 느닷없이 터져 나온 김연아와 오서 코치의 결별에 어리둥절하다. 그렇게 찰떡궁합이던 둘이 한순간에 원수처럼 서로 물어뜯고 있다.
오서는 김연아의 어머니인 박미희씨 단독결정으로 코치직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이유도 모른 채 일방적으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반면 김연아는 오서 코치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며 맞섰다. 일방적인 통보가 아니었고 결국 최종결정자는 자신이었다며 파문 이후 맹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어머니를 감쌌다.
이게 최근 김연아와 오서의 결별을 두고 뜨거워진 진실공방의 핵심포인트다.
팬들 입장에서는 과연 누구 말이 맞고 틀린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타의 모범이 되던 성공적인 파트너십이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고 만 것인지 안타깝기만 하다.
더구나 결별 '과정'을 둘러싼 진실공방만 있고 정작 중요한 결별 '이유'에 대해서는 뚜렷이 밝혀진 게 하나도 없다.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오서가 거액을 요구했다든지 오서의 지도방침이 김연아 측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지난 4년간의 훈련과정에서 사람들이 알지 못한 무슨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든지 하는 등의 알맹이가 쏙 빠져있는 사실상 의미 없는 진흙탕 공방이다.
김연아 측이 더 이상의 대응을 자제하고 사태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서 의혹만 더 커지는 양상이다. 누군가 한쪽에서 속 시원한 폭로가 없다면 사람들의 입방아질만 더 거세질 수 있다.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어쩌면 해답은 오서 측의 대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서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어디까지나 김연아와 헤어지기 싫다는 몸부림인 게 분명하다. 계속 가르치고 함께 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게 만든 김연아의 어머니가 야속하다는 거다.
그럼 왜 오서가 이렇게까지 김연아에게 집착하는지 그 진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해고과정에서 단순히 무시당했다고 그걸 복수하고자 이러는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오서는 지난 2006년 7월 김연아라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피겨 프로선수로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김연아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그때부터 코치생활을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김연아로 인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찾은 셈이고 지금은 세계 각곳에서 유망주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톱클래스급 피겨코치로 성장했다. 최근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소속사인 IMG와 거액의 재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서는 김연아를 돈 때문에 지도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하루 1시간 정도 지도하면서 시간당 한국 돈 13만원, 일주일에 65만원을 버는 게 고작이었다.
따라서 돈 문제는 아니다. 일테면 김연아는 명예직이었던 셈이다. 물론 기타 김연아로 인한 광고수익 및 지명도 향상, 그에 따르는 수입-부대수입이 크겠지만 표면상으로는 그렇다.
김연아 측에서 이유로 내건 특정 라이벌 선수의 코치설이나 지난 4년간의 훈련과정들이 크게 문제될 수도 없는 상황인 듯 보인다. 오서는 이미 아사다 마오의 코치를 맡지 않겠다고 공언했고 또 코치와 선수라는 것이 훈련을 하다보면 서로 크고 작은 트러블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걸 하나하나 트집 잡자면 세상에 운동 가르치고 배울 사람 아무도 없다.
또 하나 피겨는 야구, 축구와는 다른 개인스포츠다. 선수와 코치간의 계약 또한 기본개념부터가 다르다. 구단이 선수-코치를 통째로 쥐고 있는 것이 아닌 선수와 코치의 직거래 즉 선수가 코치를 돈을 주고 쓰는 일종의 고용-피고용인의 관계다.
고용인이 '계약 끝났으니 각자 갈길 가자'면 피고용인은 순순히 따르면 그만이다. 오서 수준의 피고용인이라면 당장 밥 벌어먹을 걱정도 없다. 이미 그에게 한수 배우겠다고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피겨유망주들이 산더미다. 이들이 진짜 돈을 벌게 해주는 존재들이다.
오서 입장에서 보면 이런 대응 자체가 자신의 명성에 걸맞지 않고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스스로 이미지에 먹칠을 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할 말을 한다.
오서는 떠들고 김연아는 입을 다물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일각에서 제기되는 오서가 언론플레이로 김연아를 죽이려 한다는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잘 보면 오서가 분노하는 대상자는 김연아가 아니다.
그는 이 와중에서도 "김연아의 앞날에 무한한 발전만이 가득하길 바란다. 지금이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김연아를 맡고 싶다"는 말을 반복하며 제자만큼은 끝까지 아꼈다.
뚜렷한 사유가 공개되지 않는 한 결론은 결국 제자에 대한 스승의 깊은 애정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 증거는 곽민정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오서는 또 하나의 원석이라던 곽민정이 같이 떠나기로 한 거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 커다란 터닝포인트와 환희를 안겨다준 첫 제자 김연아와 헤어지는 게 가슴 아프고 싫은 거다. 마치 첫 사랑을 잃는 슬픔, 자식과 이별하는 부모의 심정일 것 같다.
그것도 뚜렷한 이유 없이 제3자에 의해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꽤나 자존심 상했고 섭섭했고 억울했을 걸로 보인다.
최고의 성공을 합작한 뒤 불과 몇 개월 만에 해고통보를 받았다. 이 자체가 약간 상식 밖인 건 분명하다. 무언가 쫓겨날 만큼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이유라도 속 시원히 알고 떠났으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대응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정재호 기자, kemp@ukopia.com
Copyright ⓒ 2006~2010 uKopia Inc.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