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귀의 건축 이야기]
상하이 건축의 장소성
건축에 있어 장소성은 도시화에 따른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마치 씨를 부리기 전에 이 땅이 어떤 곳인 것인가를 모르면 경작에 실패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사실 그런 건축의 장소성도 서양으로부터 비롯된 사유의 한가지이다.
이는 산업화와 부동산 개발 붐에 도시가 흔들리는 시기에 자괴감을 느끼는 건축지식인들의 자조적인 목소리에서 비롯되었을 법하다. 일종의 현상학적인 관점인데, 아무리 후진 곳이라도 그곳에 오래 머물게 되면 곧 익숙해지게 되어 내 집같이 느끼게 되는 것이라든지, 혹은 우리가 우리들의 과거를 회상할 때 반드시 그 어떤 장소와 함께 기억될 수밖에 없게 되듯이, 인간의 존재감은 그것의 장소와 세계가 같이 일치하게 된다는 철학적인 이론이다. 그래서 그런 '장소'를 가장 시(诗)적으로 아름답게 꾸며보자는 뭐, 그런 이야기이다. 다분히 기독교적인 문화권에서 있을 법한, 무척 윤리적이며 폐쇄적인 휴머니티의 강조이다.
반면에 여기 상하이의 건축의 장소성은 철저한 실사구시관을 반영한다. 1920년대 근대 건축의 역사적 장소성도 KTV 룸살롱으로 거듭나고, 팔만 체육관의 공공성도 에스컬레이터로 타고 내려가는 유흥장소로 돌변해버린다. 이른바 프랑스 귀족이 사용한 큰 거실이 복 층짜리 룸살롱 방으로 변모하고, 지축을 흔들던 인민의 목소리도 저녁에는 자본가들의 술 취한 노래자락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 밖에도 난징로 중심의 사계광장에는 얼마든지 상업적인 이벤트가 가능하다.
무엇 때문일까? 서양에는 에피쿠르스라는 인간의 개인의 쾌락을 절대진리로 여기는 철학자 집단이 있다면, 여기에는 개심주의(开心主义)라는, 인간 개인의 즐거움과 재미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보편적인 실존주의가 있다. 즉, 서양의 장소성에는 반드시 빛과 자연을 신과 연결하여 숭배해야 한다는, 그 어떤 전체주의적인 획일성이 있다면, 여기 상하이는 오히려 그것이 개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개인의 다양성 인정이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전체사회주의 국가가 서양의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개개인의 즐거움을 더 중시 여기고 있다. 물론 그것이 구체적인 상업주의의 한 전략이라도 그 어떤 장소가 반드시 숭고한 시적인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서양의 종교주의 보다는 참으로 다른 모습이다. 인간 개인의 즐거움과 재미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라는 것이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여기 상하이의 장소성은 그 모습들의 보존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유와 전략은 그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오래도록 지속될게 틀림없다. 프랑스 귀족이 쓰던 방이 지금은 룸살롱의 방이지만, 훗날 그것이 도서관으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언제나 开心의 마음으로 그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서양이 주장하며 보존 해야 하는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는 신중심의 장소보다는 여기가 훨씬 더 인간적인 것은 아닐런지…
▷김승귀 건축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