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에서 한 중학생이 교우문제로 자살을 하면서 학내 인성교육의 부재에 대한 개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하철이나 식당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발생한 ‘~녀’ 혹은 ‘~남’으로 이름 지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SNS와 CCTV의 대중화로 빠르게 여론화되면서 우리 사회의 도덕성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개인적인 일도 쉽게 여론화될 수 있는 지금의 기술적인 환경에서 시기와 관계없이 항상 존재해 오던 일상의 사건이나 문제가 새삼 과장되거나 성급하게 드러나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이를 통해 가정과 학교, 우리의 공동체의 모습을 돌아보고 새롭게 방향을 다지는 계기가 되는 건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
인성교육이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친다는 것인지 이해하고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가정이나 학교의 인성교육을 통해 아이들 모두가 높은 수준의 도덕성이나 감수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비현실적인 꿈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그 수만큼 다양한 수준의 도덕성과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예의, 절제력, 공감력을 코치해 주어야 하는 부모와 교사의 역할과 책임이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인성교육은 특별하게 과목화하여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코칭 하는 부모와 교육자들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하는 일상 속에 녹아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영국출신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교육론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엄격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으나 진보적이고 열린 관점을 유지하며 노년에도 반전, 반핵시위를 주도하고 스스로 학교를 세워 위협 없이 자율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시도했던 실천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는 부모와 교사가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아이들을 훈육하거나 도덕성 문제를 아이의 의지력 문제로 치부하는 것을 경계하고, 부모와 교사가 직접 아이의 심리와 이에 따른 바람직한 교육법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과학적이며 지성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그는 지식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이상적인 인격 형성을 위한 성격 교육을 강조하는 교육철학을 펼쳤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적인 육아법이 대세라서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태교부터 먹일 것, 입힐 것, 교육법까지 세세하게 공부하는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지런함 이면에는 내 아이에게 능력 면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제공하기 위한 욕심이 인격 성장의 목적보다 앞서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아이가 생기고 설레고 마냥 예뻤던 시기가 지나 아이가 사춘기가 되고 아이와 부모간에 공감의 영역이 줄어들면서는 필요한 의무적인 역할을 해줄 뿐, 아이의 성격이나 성인기로의 이행을 좌우할 중요한 인생의 경험을 놓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됩니다.
교사들은 어떤 가요. 한 반에 다양한 아이들을 한꺼번에 다뤄야 하는 교사들은 자칫 아이들을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러셀은 특히 이러한 교육자들의 경향에 주의를 주었는데, 나도 모르게 나 자신, 학교, 국가를 위해 학생을 수단화할 수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 주의를 가지고, “확대된 부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교사가 옳다고 믿는 교육법이 아이들에게 최선인지 늘 경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는 교육의 목적을 <활력>, <용기>, <감수성>, <지성> 이렇게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 중 <지성>은 이미 가진 지식이 아닌 계속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로서 혹은 교육자로서 우리는 아이들의 인성에 대해 시대를 개탄하기 전에 우리가 인성 교육에 대한 “지성”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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