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上海人을 青浦에서 만나다
장소: 송저문화유적지, 칭푸박물관
상하이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 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이러한 물음들을 가진 채 ‘최초의 上海人’을 찾아 떠나본다.
5,000년 전 상하이의 생태환경
5,000년 전 상하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정글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산들은 상록수와 활엽수림으로 뒤덮혀져 있었고 칭푸취 송저지역의 호수와 늪의 면적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기후는 중아열대기후로 지금의 온도보다 1~2도 높았으며 중앙아시아의 정글처럼 따뜻하고 습했다.
송저문화(崧泽文化)란 무엇인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에 존재했던 송저문화는 마가방(马家浜)문화와 양주(良渚)문화 사이에 있던 문화로 그 당시 사회는 모계중심 사회에서 부계(우두머리)중심의 사회로 가는 단계에 있었다.
송저문화의 유적지들은 장강(长江)의 하류와 동쪽의 바닷가 부근에 위치해 있다. 상하이 칭푸취(青浦区)송저촌에 위치한 유적지는 1957년에 발견됐는데 1960부터 1995년까지 4차례의 고고학발굴이 있었다고 한다. 그곳의 면적은 150,000㎡를 차지한다. 1982년 중국 고고학 모임에서는 이 문화가 독자적이고 번창한 문화로 인정하면서 지역이름을 따서 ‘송저’문화라고 이름 붙였다. 이렇듯 송저문화는 상하이의 오래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보여준다.
崧泽人의 생산과 생활방식
(1) 석기
중국 농사 문화의 시초가 된 오나라와 월나라 지역들은 송저문명에서 신석기시대 도구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당시 농사기구들과 가정용기들의 혁신적인 발명은 송저문화가 쟁기단계로 선두로 건너가는데 기여를 했다. 돌로 만든 쟁기의 탄생은 송저문화이 마가방문화보다 더욱 발달됐다는것을 증명해준다. 그리고 송저문화 때 발명된 돌쟁기는 양주문명의 중요한 농기구가 되기도 한다.
중간 아니면 밑층에서 발견된 송저시대의 농기구들은 주로 몇km씩 떨어져 있는 곳의 ‘화산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단단한 화산응회암이 도끼, 자귀, 끌, 화살촉으로 만들어지기까지에는 두들기고, 자르고, 매끄럽게 하고, 구멍을 뚫는 작업들을 필요로 한다. 인간들을 다른 동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중요한 점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동물들도 도구를 사용하긴 하지만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떨어진다. 하지만 인간들은 도구를 사용해서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힌다. 나는 이런 도구들을 보며 인간두뇌의 명석함을 볼 수 있었다.
(2) 자기
송저 시대의 자기들 중에는 그물에 매달아 그물이 물속에 가라앉게 하는 어로도구인 ‘그물추’ 가 독특하다.
(3) 골각기
그 당시 뼈로 만들어진 도구들은 쪼개고, 자르고,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들을 통해 만들어졌다. 뼈와 뿔은 돌에 비해 가공이 쉽기 때문에 다양한 도구들이 제작될 수 있었다. 박물관에는 뼈로 만든 화살촉, 바늘, 칼 등이 있었는데 사냥할 때나 자르거나 바느질할 때 이용됐다.
(4)송저인의 생활용구
송저문화 시대에는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했다. 물레가 도자기 만드는데 적합하게 발전됐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자기들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될 수 있었고 많은 자기들이 주로 눌려지거나 새겨진 문양들로 장식됐다. 이것들은 성숙하고 독특한 중국 신석기시대 자기들을 대표하고, 또한 그 당시 상하이 사람들의 미학적인 점들을 잘 보여준다.
Ding(鼎)은 그당시 주 요리기구였다. 처음엔 fu(釜)모양이었지만 입이 큰 pan(盆)모양으로 나중에 바뀐다. Dou(豆) 는송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던음식 보관 용기로다양한 모양과 문양들을 자랑한다. 또한 자기에 작은 홈들을 파서 음식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창의적인 방법들을 사용했다.
(5)송저인이 사용한 장신구
세계에서 옥을 가장 좋아하는 민족 중 하나인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옥을 사용해왔다. 이르기로는 송저문화부터 상하이인들은 옥 다듬는 기술들을 터득해 옥에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을 불어 넣었다. 이것은 양주문명의 옥가공 제조기술과 후세 중국 옥문화의 터를 닦아 놓았다고 한다. 송저시대의 옥들은 화산석을 자르고, 다듬고, 광택을 내어 만들었다. 옥을 가공한 흔적들이 아직도 몇몇 옥장식품들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이시대 옥으로 만든 장신구들에는 판 형식의 구슬(璧), 팬던트(璜), 장례용품(琀), 팔찌(镯) 등이 있다.
송저인들은 마가방인들보다 장례용품을 더 많이 썼다. 몇몇의 송저문명 무덤에서는 개인 사유물의 징표로 가축돼지의 뼈를 넣기도 했는데 이것을 보고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가족이 같이 묻힌 무덤들을 보고 송저문화시대 때도 가족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칭푸 외곽에 위치한 칭푸 박물관은 새로 조성된 지역에 있어서 그런지 아주 깔끔했다. 주말을 맞아 박물관 앞의 광장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지나면서 최초의 上海人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에 부푼 기대를 안고 박물관을 입장했다. 전시관으로 걸어들어 가면 제일먼저 송저 유적지에서 출토된 사람의 두개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흉상이 눈에 띈다.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고 현재 사람들과 모습이 다를것이라고 생각한 나를 놀래켰다. 박물관 관람은 사람이 살기전의 상하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비디오로 온통 물로만 덮혀있던 상하이 지역이 시간이 흐르면서 물이 마르고 땅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습하고 늡지대였던 초창기 상하이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재현해 놓은 것을 보고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땅이 5,000여년 전에는 저렇게 생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면 송저 유적지에서 출토된 두개골이 나온다. 여느 두개골과 다름없어 보였지만 5,000년 전 두개골이라는 생각에 한참 들여다 보았던 기억이 난다. 남은 전시관을 돌며 나머지 출토 유물들을 봤다. 모두다 농기구, 사냥기구, 장식품 등이었다. 하지만 밀랍인형들로 송저문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재현해 놓은 곳에서는 저 열약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우리가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해주었다.
최초의 上海人을 만나고 나오면서 머리에 맴도는 생각은 인간이 ‘美’를 추구하는 동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와 다른 동물들의 차이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송저문화 사람들의 옥 장식품이나 자기에 새겨넣은 섬세하고 세련된 문양들을 보며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특히 자기에 새겨넣은 문양들은 디자인이나 기술에서 현대시대의 문양으로 써도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에도 바빴던 그 시대에 이러한 예술적인 면을 추구한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인간의 여러 가지 본능 중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미를 사랑하는 본성을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최초의 上海人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상하이에듀뉴스/양근영 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