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있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칭화대(清华大学)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때 한 여성이 박근혜에게 귀중한 선물을 전했다. 그것은 서예 작품 족자로 중국 현대 철학의 대가인 펑유란(冯友兰)의 작품이었다. 그가 89세의 나이에 손수 적었던 당나라 시인 왕칭링(王昌齡)의 송별을 노래하는 시로 평소 펑유란의 오랜 팬 이였던 박 대통령에게 큰 선물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대중에겐 생소할 수 있으나 펑유란은 20세기 중국의 대표적 철학자이자 철학사가이다. 그의 생애는 중국 철학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나라 말엽에 출생한 그는 1918년 베이징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학술연구를 할 기회가 있었으나 중국으로 다시 귀국한 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중국 학생들을 위해 교단에 서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국공내전의 결과로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건너갈 때, 함께 가자는 장제스의 요청을 거절하고 중국 본토에 남는 선택을 한다.
이후 펑유란은 공자와 유교에 관한 이론을 마오저둥의 사상에 맞게 재해석해서 마오저둥의 호감을 샀으나,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유교를 탄압하는 정책으로 고초를 겪게 된다. 이후 다시 복권한 후 중국철학사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고, 1990년 95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중국의, 중국에 의한, 중국을 위한 철학
펑유란은 대표 저서들을 통해 당시 보수적인 양명학 계열의 신유학 부흥 운동과 달리 주희(朱熹)의 성리학 계열을 계승하는 신이학(新理學)을 개창하고자 했고, 1933년에 발표한 신이학은 20세기 신유학의 한 분파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는 신이학을 발표하며 '이(理)'와 '도(道)' 같은 철학적 개념을 신유학과 도교로부터 가져와서 분석하고 그 함의를 서양철학적 전통에 입각하여 발전시켜 이성주의적 신유학 형이상학을 만들어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도덕의 본질을 설명하고 인간의 도덕적 발전의 구조를 풀어냈다.
특히 펑유란은 인간과 자연의 본질을 봄에 있어서 항상 중국 고전철학의 인성설(人性說), 특히 송학(宋学)에서 근거를 구했다. 당시 국립대학에서는 듀이, 러셀, 베르그송, 칸트 등을 강의하는 사람이 많아 외국사상이 범람하고 있었으나, 그 속에서 그는 동서철학을 종합하면서 중국철학의 주체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조국의 철학을 너무나 사랑한 철학자
그는 마오저둥에게 "과거 봉건철학을 강의하면서 국민당을 도왔지만, 사상을 개조해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서 5년 안에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중국철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편지를 보내 신중국에 남았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의 초기 저술들을 부정하고 그 이후의 저작들도 문화혁명의 이상에 맞추어 수정을 하라는 강요를 받았으며, 그는 이에 응했다. 이 때문에 국내외로 그의 철학을 고름 철학이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많다.
그는 당시에도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중국을 떠나지 않았고, 긴 고난의 시간을 참아내며 고령의 나이에 중국인 최초로 중국 철학사를 발간해내기에 이른다. 펑유란이 평생 좋아했던 말 중에 "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지만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시경>의 한 구절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중국 철학의 미래를 생각하며 동 서양의 철학 안에서 중국철학의 입지를 다지고 싶어했는지 엿볼 수 있다.
특히 한국에도 발간된 ‘간명한 중국철학사’는 복잡하고 무거웠던 원래의 중국철학사를 쉽게 한 권으로 축약한 것이다. 그러나 축약을 했음에도 그의 서술에는 깊이가 있고 이해하기 쉽다.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 에게도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시사하는 고전, 중국 철학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펑유란의 저서들을 주저 없이 펼쳐보길 추천한다.
▷ 유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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