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항일투사 33인-5]
'조선말큰사전' 완간 정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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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표지. 일제강점기에 93호까지 발행함. |
3•1운동 참여
1919년 봄 법률전문학교에 지원을 해놓고 입학시험을 기다리던 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필운동에서 10여명의 학생과 하숙을 하고 있었다. 3•1운동에 가담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였다. 이후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일제 경찰이 주모자들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당분간 고향에 은신하여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여 독립선언서 1장을 접어서 버선 밑에 숨겨가지고 장수로 내려갔다. 그 해 겨울 다시 서울로 올라가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고자 공부에 전념하였다.
1921년 4월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고, 1925년에 졸업하였다. 재학시절 스승 정인보와 선배 김윤경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확립하였다. 특히 선배 김윤경과의 교유를 통해 주시경의 국어문법 학설을 체계적으로 습득하였다. 이것이 그를 우리말 연구에 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어대사전 편찬 관여
1936년 4월 1일 선배 최현배의 권유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 조선어사전 편찬 업무를 맡았다. 조선어학회에도 가입하였다. 그는 7대(1937-1938) 조선어학회의 간사(출판부)를 역임하였다. 8대(1938)에서 12대(1942)시기까지 이극로와 함께 조선어학회의 간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인승은 “말과 글을 그대로 지니고 지켜가고 있는 민족은 비록 남의 민족 밑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독립이 되어 제 나라를 세울 수가 있되 말과 글을 잃게 되면 그 나라 그 민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굳은 신념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그는 “궁극적으로 우리민족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말과 글을 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의 편찬사업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긴요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꼈다.”(「국어운동 50년」, <전북일보>, 1977, 7, 12.)이와 같은 우리 말글의 인식을 가지고 그는 국어사전편찬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한글학회 연구위원 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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