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응답하라 8.15 공모전’
글짓기 부문 학생부 최우수상 수상작
[국가대표]
“우와아아아!!”
1936년 8월 9일 백림(베를린). 우레와 같은 사람들의 함성소리.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습니다. 관중 가운데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일본인, 독일인, 영국인………그러나 우리 동포들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대를 했던 내 자신이 더욱 바보 같지 만요. 오후 3시, 출발 신호가 울리자 나는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출발이 다소 늦었습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 나를 앞질러 가는 선수들이 보였습니다. 나는 조금은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나는 침착했습니다. 아직 나에게는 힘이 남아있었으니까요.
1936년 8월 9일 조선. 그가 ‘국가대표’로서 달리고 있는 동안, 보도기관 앞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결과를 한시라도 빨리 알기 위해서였다. 분명히 조선인인데도 조선의 국가대표로 나가지 못한 그. 선수가 큰 국제대회에 나갔는데도 기자 한 명 보낼 힘 없던 그의 조국은 이렇게나마 그를 응원하기로 했다. 그 곳에 모여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외의 일제 치하에서 고통을 받던 모든 한국사람들은 그의 선전을 기원하고, 또 염원하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나마 그에게 이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요. 이윽고 흔히들 말하는 ‘문제의 언덕’, 비스마르크 언덕 오르막에 다다랐습니다. 신체가 한계에 다다른 기분. 일부러 나에게 맞지 않는 신발을 준 그들이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을 것입니다. 내 발에 비해 작은 그 신발은 점점 나의 발을 옥죄어 갔습니다. 그 와중에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이미 제 다리는 제게 아닌 것 마냥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온 몸의 오장육부가 포기하라고, 이쯤이면 됐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내 곁에서 웅웅대는 관중들의 응원소리마저도 짜증이 나던 그때, 불현듯 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의 조국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 속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일제 아래, 힘없는 조선 백성들은 앓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전날만해도 옆에 살고 있던 가족 같던 이웃이 다음날 허망하게 사라져있는 일이 부지기수요, 길에서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일제 순경에게 매를 맞고 있는 사람이 비일비재했다. 피해자, 방관자, 혹은 매국노. 조선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억울했지만 오직 이 세가지 길밖에 없었다. 독립을 부르짖던 이들은 수감되어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이를 본 수많은 민중들은 찍 소리도 못하고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나에게도 이런 화가 미칠까 겁먹은 사람들은 일제의 편에서 자신과 같은 민족을 어둠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15년, 나라가 일제에게 잡아 먹힌 뒤로, 이 참상은 지속되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겉은 고요했지만 속은 처절한 신음소리로 가득하였다.
내 조국에 있는 나의 혈육, 나의 동포들. 그들의 얼굴이 내 심금을 울리었습니다. 이같이 어둡고 참혹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내 한 몸 바치어 좋은 성과라도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습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침착하게 달리었습니다. 최대한 담담하고 묵묵하게.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콜로세움 안으로 진입한 내 자신이 보이더군요.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 네, 저는 그때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대학생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물리쳤습니다! 우승자 ‘손’이 지금 막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신장 160cm. 왜소하고 깡말랐던 그가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했듯이, 약하고 힘없었던 조선 사람들도 ‘독립’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손발톱이 뽑히고, 사지가 찢기는 언덕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작고 힘없었던 그들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뿜어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마음속에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평화로운 동지들의 얼굴을 계속해서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계속되는 고난에도 그들은 침착했다. 그들 마음속에 층층이 쌓여있던 분노는 무엇으로 표출해내도 부족했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 뒤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조국 땅을 떠나 낯선 이국 땅으로 망명하면서까지 거사에 앞서 항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던 그들. 당시 조선과 같이 일제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중국. 그 넓은 대륙에서도 조선의 독립 투사들만큼의 의지와 용기를 보인 사람이 없었다. 그들의 괴로웠던 투쟁은 베를린에서의 마라톤과 또 다른, 그들만의 힘겨운 마라톤이었다.
2시간 29분 19초 2. 나는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난 기뻐할 틈도 없이,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어야만 했습니다. 오후 6시 15분, 표창대 위에 서 메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온 콜로세움에 흐르던 그 노래는, 나를 너무나도 비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분명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를 계속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그저 내 손에 들리어있던 월계수로 치욕스러운 일장기를 가리는 것뿐 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는 그곳에서 내 친구에게 엽서를 한 장 보내었습니다. “슬푸다.” 이 석 자를 쓰면서 슬픔 이상의 감정이 나에게 물밀 듯 밀려온 것을 그 친구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의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은 오랜만에 들뜬 분위기가 되었다. 비록 ‘Kitei Son’이라는 이름으로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기미가요를 들으며 고개를 숙인 그였지만 그의 아픔을 조선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를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가슴에 낙인처럼 찍혀 있던 일장기를 지우기도 하였다. 무모하다면 무모한 짓이었다. 사진 화질이 안 좋은 것을 기회로 삼아 하얗게, 말끔하게 지워낸 일장기. 그 자리가 공허하기는커녕 눈부시게 빛났다. 마치 그 빈자리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사람들은 괜스레 뭉클해했다. 이 기쁨도 잠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은 신문사들은 일제에 의한 탄압을 받았다. 나라 잃은 민족에게 언론의 자유가 있을 리 무방했다. 소심한 저항이었지만, 그것마저 봐주지 않았던 시기. 바로 ‘일제강점기’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기정’입니다. 나는 조선인이었지만, 조선의 국가대표는 아니었습니다. 아직도 올림픽 기록에는 내가 일본인이라 되어있습니다. 이는 참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나의 조국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2016년 8월. 전세계인들의 축제인 올림픽이 브라질 리우에서 열렸다. 그곳에서 메달을 따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들은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아름다운 애국가를 들으며 마음껏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아울러 대한민국 사람들은 떳떳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전세계에 위상을 떨치고 있다. 이제 그 누구도 길거리에서 경찰에게 갑자기 매를 맞거나, 의로운 일을 했다고 고문을 받거나, 일장기를 지웠다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 받지 않는다. 독립 운동가들이 그토록 원했던 세상이 온 것이다.
하지만, 몇 십 년 전에는 한국 사람임에도 일장기를 달고 기미가요를 들으며 메달을 땄음에도 우울했던 조선의 청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롯하여 일제 치하를 벗어나려 애썼던 수많은 애국열사들이 저마다 구슬 땀을 흘리며, 뜨거운 피를 흘리며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조국의 독립.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어딘 지 모를 결승선을 향해 달렸다. 기나긴 마라톤을 그들도 함께 뛰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바로, ‘독립’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뛴 ‘국가대표’들이다.
여지원(상해한국학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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