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만국공묘에서 파묘
9일 대전 현충원에 안장
상하이시 만국공묘에 잠들어 있는 독립유공자 김태연 지사가 98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간다. 상하이총영사관은 지난달 28일 칭닝구 송칭링 능원 내 외국인 공동묘지에서 김태연 지사의 파묘 행사가 거행됐다. 유족과 한중 양국 정부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고 전했다.
김 지사의 외손자인 유족 조관길씨는 “1975년에 돌아가신 어머니(김지사의 셋째 딸)도 외조부님께서 묻혀 계신 곳이 정확히 어느 곳인지 몰랐는데, 5년전 우리 정부에서 외조부님의 무덤을 찾았다고 연락이 와 고국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일찍 찾아 뵀어야 했는데 여기 와서 뵈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파묘 행사 후 오전 8시부터 송칭링 능원 측이 제공한 인부들이 파묘를 개시했다. 김 지사의 유해단지는 잘 안치돼 있었다. 유해단지는 미리 준비된 나무 상자에 담은 후 유족 대표인 조관길 씨와 국가보훈처 관계자가 태극기로 덮고, 상하이시 외판측에서 지정한 외국인 전용 화장장인 익선빈의관으로 운구해 이날 오후 유골 세척과 표백을 실시했다. 다음날, 익선빈의관에서 유족이 입회한 가운데 화장을 마치고, 김 지사의 유해는 임시안치소에 모셔졌다.
이날 최영삼 총영사는 인사말에서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김태연 지사님의 유해를 오늘 드디어 고국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김 지사님의 마지막 귀국길에 동행해 매우 감개무량하게 생각하고, 김 지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전했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8일 오전 유족과 함께 익선빈의관에 임시 안치된 김태연 지사의 유해를 국내로 이송할 예정이다. 이어 9일 오후 3시 30분, 인천국제공항에서 국무총리 주관으로 유해봉영식을 거행한 후 김태연 지사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김태연 지사는 1891년 황해도 장연 출생으로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아내와 네 딸을 고향에 남겨두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독립운동을 펼치다 2년 후 1921년 그의 나이 만 30세로 병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다양한 분야에 애국활동을 벌였다. 김 지사는 몽양 여운형 등과 함께 상하이대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해 한인들의 자치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구국모험단 참모부장을 맡아 군자금 모집, 무기 구입, 일본 관청 파괴 및 일본 관리 암살 등 무장 투쟁을 벌였다.
또 김 지사는 1921년 상하이 한인 자녀들의 교육 기관인 인성학교 교장을 맡아 동포들을 위한 교육 사업에도 나서기도 했다. 김 지사가 숨진 직후 당초 징안쓰공묘에 안장됐다가 수차례 이장을 거쳐 현재의 만국공묘로 옮겨졌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면서 김 지사와 함께 만국공묘에 묻혔던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선생과 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윤현진•오영선 지사 등의 유해가 한국으로 옮겨졌지만 김 지사가 이곳에 묻혀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확인이 됐다. 다른 지사들과 달리 묘비에 ‘TAI Y KIM’이라는 영어 이름만 적혀 있어 확인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숭실대 8회 졸업생인 김태연 애국지사는 재학시절 문학부가(교가)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이후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생로병사문제가 대두됐다. 특히 3.1운동 직후 고령이거나 지병이 있는 경우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하이의 문화지도’ 자료에 따르면, 독립운동가들은 운명의 순간 하나같이 “나라를 찾는 걸 못보고 세상을 떠는 것이 오직 천추의 한”이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수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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