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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_우수상] 제이(J)의 정원

[2020-12-14, 10:35:59] 상하이저널
역시 예상한 대로 이사를 하고 보니 더욱 황량했다. 집 안에서는 채 마르지 않은 콘크리트 냄새가 났고 행여나 틈이 있으려나 실리콘 총을 구해다 온 틈새를 찾아 다니며 공간을 메워 나가는 날이 늘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오면 300여 가구 남짓한 샤오취 마당은 허허벌판처럼 넓게 느껴졌다 어느 한 곳 심은 듯, 자라는 풀은 없었고 군데군데, 먼저 입주한 방의 켜진 불은 마치 항해하는 함선의 소등시간처럼 그저 쓸쓸하고 서글프기까지 했다. ‘정말 이 곳에 정을 붙일 수는 있을까... 그래, 시세차익만 생기면 그땐 미련 없이 떠나자’ 
그렇게 겨울을 맞이할 즈음, 북쪽으로 난 주방 건너 편 새로운 아파트를 짓는 현장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문득 달력을 보면서 ‘춘절’이 가까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았건만 고향을 찾는 민족 대이동은 건설현장에서부터 시작되는가 싶었다. 

마스크를 받으러 온 교민들의 행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우중루에 위치한 한국상회 6층. 엘리베이트 앞에 펼쳐 진 장사진의 줄에 도착한 교민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두려움과 침묵, 극도의 민감함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얼굴에 묻어났다. 여권확인과 큐알코드 스캔 안내를 맡았다. 두 개의 마스크를 겹쳐 썼다. 호흡도 호흡이지만 안경에 습기가 차 잘 보이지 않았다.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는지, 그 위험이 어떤 가공할 힘을 가졌는지 아직은 몰랐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랬기에 그저 할 수 있는 방법만 생각했다.

위쳇을 통해 소집한 자원봉사자가 하루하루 늘어났다. 설마 하는 염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 숫자가 희망이 되고, 그 얼굴이 에너지가 되었다. 따뜻한 커피와 구운 계란, 포장 한약, 도시락, 손편지에 기부금까지, 우리의 이웃들은 현장에서 함께 해 주지 못함을 그렇게 표현해 주고 갔다.  1차, 2차, 3차, 4차 배포… 갈수록 도무지 그 숫자가 줄 기세가 보이지 않을 무렵, 서서히 일상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뜨거운 겨울 난로처럼 선명한 추억을 아로 새겨주었다.제이 또한 어렵사리 구한 마스크를 모아 일면식 없는 샤오취 관리실에 이름 없이 기부했다. 

그 뜨거운 겨울을 보내는 동안 봄은 우리 마음속에 먼저 와 있었고 뒤늦게 따라온 봄 끝에 “한풍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초여름에 시작된 행사계획은 끊어질 듯 이어졌고 결국은 체감온도 40도를 넘나드는 8월 한여름, 차가운 생수 한 병에 의지하며 바쁘게 뛰어 다닌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마스크만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땀은 지난 겨울 현장에서 겹쳐 입은 외투 안의 땀과 다르지 않았다. 

그 여름이 다 갈 무렵, 제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집 베란다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키 큰 다육이 한 촉을 마당 화단에 심었다. 생각보다 빨리 자라 화분이 작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다육이 에게 맞는 땅을 찾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샤오취 너른 마당에 두 평 남짓한 둥근 나무목책 화단이 있었지만,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터 이었다. 주민위원회에 알려 관리를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수와 재시공 요구 등 큰 골칫거리를 둔 주민 단체 방에다 화단문제를 공론화 할 수는 없는 것 이었다.

진흙으로 메워진 화단은 화초가 자라기에는 생각보다 단단하고도 척박했다. 지렁이가 숨 쉴 틈조차 없어 보이는 토질을 보니 답답한 마음이 들어 베란다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포실포실한 영양토와 함께 뿌리를 묻었다.  3일이 되자 새 잎이 났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어느 날 아침에는 큰 구덩이 자국과 함께 다육이가 사라진 것이다. 

‘내가 섣부른 판단을 한 것 일까? 이 사람들을 믿은 내가 바보인가….’

며칠을 서운하고도 불쾌한 마음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시간이 흐르자 점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보라지 안 가져 갈 때까지 심지 머’ 

제이는 다시 베란다의 장미며, 보라색 꽃이 앙증스런 孔雀兰满天星(한국이름 모름)을 옮겨다 심었다.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토요일 오후를 택했다. 따뜻한 햇살이 마당 한가운데 오래도록 머무는 시간에 마치 시위라도 하듯, 모종 삽이며 알갱이 비료, 물 조리개를 들고 나와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널어 놓고 화단을 파고 또 화초를 심었다.  아침 운동 길에 마주치기만 했던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신기하고도 반가운 척, 제이에게로 다가왔다.
’무얼 심고 있느냐. 왜 여기에다 심느냐, 얼마 줬냐’ 그들의 질문은 거의 세 가지에 머물러, 간단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제이의 대답을 접하고 서야  비로소 그녀가 중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서울우유 병은 다른 병과 달리 직각모양이라 유성펜 쓰기가 좋았다 빈 곽을 올챙이 모양으로 자른 후, 서툰 중국어로 “꽃을 파가지 마세요, 함께 보면 더 즐거워요 402호”라고 적어 화단 꽂았다 그 날은 꼬마들이 마당에 몰려 나온 일요일 오후였다 그들의 질문은 어른보다 많았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모든 화초가 새로이 잎을 피우던 어느 날,  그 작은 화단에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언젠가 아침에는 누군가가 철쭉을 옮겨다 심었고 그 어느 저녁에는 미니장미 두 그루가 초라하지만 꽃을 피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또 그 다음 주는 소철나무… 그렇게 화단은 들쭉날쭉 순서 없이 꽃과 나무가 자리를 틀었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다.  반려견을 살뜰이 챙기는 그 곳의 사람들이었지만 화단을 터 삼아 산책 필수 코스로 여기는 강아지들을 굳이 말리지는 않은 그들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제이의 화단 근처에서는  언제부턴가  전전긍긍하며 서 있던 때도 이 때와 같이 한 듯 했다. 

2020년 이 한 해, 우리는 코로나라는 위기를 함께 극복해 온 동지로서 혹은 이웃으로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었다. 그리고 그 도움을 받은 누군가는 또 다른 이에게 도움을 나눠 주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충만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비단, 도움의 유무만은 아닐 것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난 새로운 존재들은, 이 곳 중국 속의  한국인으로 살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감싸주는 아름다운 이웃이었던 동시에 미처, 발견해 내지 못했던 가슴속 깊은 곳에 꿈틀거리는 뜨거움을 간직한 스스로의 모습 이었을 것이다.

이제 제이의 화단은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각양각색의 蝴蝶花(팬지꽃)이며 주황빛깔의 작은꽃 얼굴을 가진 洛阳花(패랭이꽃)류의 冬花草로 가득하다, 눈이 와도 꽃을 피울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가진 이 꽃들이 말로 새로운 삶에 뿌리를 내리려는 제이에게는, 올 한 해 만나왔던 수많은 이웃들이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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