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납치협박 사건에 ‘삼합회’ 개입 정황
중국계 폭력조직이 국내에 상륙한 단서가 포착됐다. 최근 서울 강남에서 잇따라 발생한 납치협박 사기 사건에 중국계 폭력조직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고, 범인들이 사용한 계좌번호 중 하나가 국세청을 사칭한 세금환급 사기사건 계좌와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세청 사칭 세금환급 사기사건의 배후에는 중국 폭력조직인 삼합회(三合會)가 있는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국정원이 올 들어 경고한 중국 폭력조직의 국내 잠입설이 현실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계좌당 40만원에 팔아넘겨=지난 14일 오후 12시57분쯤 정모(45·서울 삼성동)씨는 “아이를 납치했으니 1000만원을 보내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씨는 “돈이 없다”며 500만원을 입금했다. 18분 뒤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의 A은행 지점에서 돈이 인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씨는 납치됐다던 아들이 멀쩡한 것을 보고, 곧바로 지급정지 신청을 했고, 범인들은 280만원만 뺀 채 달아났다. 정씨의 휴대전화에는 중국 국제전화번호가 찍혀 있었다.
경찰조사 결과, 이 통장계좌는 한국인(28)의 것이었다. 대만국적 여행사 가이드인 장모씨가 한 계좌당 7만원씩 주고 사들인 27개 통장 중 하나였다. 장씨는 이 통장을 다시 다른 대만인 3명에게 계좌당 40만원을 받고 팔아 넘겼고, 이들은 중국 현지에 있는 S씨의 지휘를 받아 현금을 인출한 것으로 경찰은 보고 있다. 경찰은 일단 통장을 팔아 넘긴 대만인 장모(40)씨와 한국인 김모(40)씨를 붙잡아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다른 대만인 3명에 대해서도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경찰은 사건의 핵심으로 대만인 S씨를 지목하고 있다. 경찰은 S씨가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고용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협박 전화를 걸게 한 것으로 보고 중국 공안 당국에 공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경찰은 제주와 용인 등 전국 곳곳에서 신고된 가짜 납치협박 전화가 31건에 이르는 사실을 밝혀내고 S씨 등이 관여했는지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중국 폭력조직 삼합회 연관 의혹=경찰은 이번 사건에 중국계 폭력조직 삼합회(三合會)가 관여했는지 주목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삼합회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국세청 세금환급사기 사건과 수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무작위로 협박 또는 회유 전화를 한 뒤, 은행 현금인출기로 송금토록 하고, 조직원을 보내 현금을 인출하는 수법이 이번에도 사용됐다.
이와 관련, 지난달 15일에는 국세청과 건강보험공단 직원을 사칭해 “세금이나 보험금을 환급 받으라”고 속인 뒤 은행계좌에서 돈을 빼낸 중국인 4명이 구속됐다. 당시 경찰은 이들로부터 홍콩 폭력조직 삼합회 계열인 ‘신이안파’ 조직원이고, 일본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파’가 연계돼 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청 관계자는 “올해 초부터 급격하게 퍼진 이번 범죄수법은 10년 전쯤 대만에서 한때 유행했다”며 “범인들은 계좌개설이 쉽고 통장인출 한도가 높은 점을 이용해 한국을 범행대상으로 삼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국정원이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 잠입한 27개의 해외 폭력조직 중 중국의 폭력조직은 푸젠성 삼진회, 예지 강동화파 등 7개 조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계인 삼합회는 주로 마약밀매와 밀입국 알선 등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홍콩계 삼합회와 대만계 조폭은 20여년 전부터 중국대륙으로 진출, 중국 공안도 손대기 쉽지 않은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일부 조폭은 기업화단계에 이르러 채권해결과 돈세탁 등 지하금융 활동까지 벌이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청 관계자는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며 대포통장(다른 사람 명의로 된 통장)을 이용하는 식으로 철저히 신분을 숨기는 데다, 중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검거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