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을 저지르는 데 선수였다. 궁금한 걸 잘 참지 못했다. 계약 연애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다. 방송국에서 일할 때였는데, 일로 만난 남자에게 계약 연애를 제안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황당한 제안을 받았음에도, 그가 선선히 응해 짧은 만남을 가졌다.
다링하오완도서관(大零号湾图书馆)에 들어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때의 일이 기억났다. 원형 유리 천장과 그에 이어진 원형 책장에 진열된 책들. 흐트러짐 없이 질서 정연한 그 모습이 정교하게 설계된 시계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둥그런 벽을 따라 줄지어 장식된 책들은 가짜처럼 보였다. 오래전 기억이 소환된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약 연애는 보통 두 사람이 특정 목적을 위해 연애 관계를 계약으로 정하고, 정해진 기간 연애를 한다. 주로 웹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 등장하는데, 현실에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현실에서 계약 연애가 가능한지 궁금했고, 철저한 조건과 계약 아래서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잘 통제된 미학을 보여주는 도서관의 기하학적 설계와 손에 닿지 않게 진열된 책들은 계약 연애를 닮았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명확한 조건과 기한을 정해 모든 과정을 통제하는 계약 연애처럼, 도서관은 철저하게 계획된 구조 속에 책을 그림처럼 전시해 놓았다. 계약 연애의 질서와 구조는 완벽해 보이지만,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진열된 책처럼 진짜 감정에는 닿을 수 없다. 읽을 수 없는 책처럼 무늬만 사랑인 가짜다.
회전계단을 따라 2층, 3층으로 올라가니 열람실이 나왔다. 일요일 오후인데도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책을 읽거나 공부하고 있었다. 유리 천장 아래 벽면을 두른 거대한 서가와 달리, 열람실에 있는 책장들은 키가 작고 아담했다. 서가 사이를 다니며 원하는 책을 꺼내 보기에 편안한 구조였다.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서가에 나란히 꽂힌 책의 책등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책 한 권을 꺼내 페이지를 만지작거리며 넘겨보았다.
책을 만지며 읽기 시작한 순간, 비로소 다링하오완도서관이 좋아졌다. 영화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계약 연애가 흥미로워지는 지점 역시 주인공들이 계약을 어기거나 틀을 깨는 순간이다. 감정을 배제하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던 두 사람 사이에 감정이 생기는 순간. 갈등은 커지고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사랑이다.
치기로 시작한 계약 연애는 계약한 기간도 채우지 못하고 금세 끝을 맺었다. 영화에서처럼 극적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계약 조건에 묶여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보니 도무지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소울메이트는 어떻게 알아보나요?”
브리다는 이것이야말로 자기 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
“실패와 실망, 좌절을 감수함으로써.”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중)
완벽하게 통제된 사랑은 환상일 뿐이다. 얼룩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