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제왕 금슬좋은 부부 (4)
명태조 주원장(明太祖 朱元璋)하면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구사한 가혹한 인물이라는 것과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 가장 미천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큰 발의 마황후가 떠오른다.
주원장은 빈곤한 집에서 태어나 어려서 지주집 목동생활을 했으며 가뭄과 역병으로 가족을 잃고 나서는 탁발승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당시 홍건군(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봉기군)의 봉기가 발발하자 곽자흥(郭子兴)의 봉기군에 투신해 혁혁한 전공을 올린다. 비록 용모가 추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감한 주원장이 맘에 들었던 곽자흥은 자신의 양녀인 마(马)씨를 배필로 맺어준다. 마씨는 어질고 착한 성품과 지모를 갖춘 총명한 여인이었다.
곽자흥이 주원장을 총애하자 그의 두 아들은 주원장을 시기하여 비방하고 헐뜯었으며 시간이 오래가자 곽자흥도 점점 주원장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러다 한번은 주원장을 옥에 집어넣고 먹을 것을 주지 못하게 했다. 며칠 후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된 마씨는 남편에게 가져다 줄 떡을 몰래 구웠다. 그런데 양모 장씨가 갑자기 나타나 급히 떡을 숨기느라 한 것이 가슴속에 집어넣게 되었다. 마씨의 어색한 모습에 양모는 웬일이냐 물었고 마씨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양모는 곽자흥을 찾아가 따졌고 주원장은 비로소 풀려나게 되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뜨거운 떡에 아내의 가슴이 벌겋게 데어 있었다. 주원장은 이런 아내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고 더욱더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또 한 번은 곽자홍의 두 아들이 주원장을 죽이려 음모를 꾸미고 술자리에 초대했다.
주원장이 거절을 못하고 떠나려 하자 아내 마씨가 "가다가 말을 놀라게 하여 돌아오십시오. 그들은 성정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들이라 장군을 해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원장은 이처럼 총명하고 사리분별이 밝은 아내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곽자흥이 죽은 후 주원장은 두목이 되어 홍건군을 이끌었으며, 1368년 41세 되던 해 난징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등극했다.
주원장은 "짐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는 밖으로는 공신들의 노고가 있었고 안으로는 현명하고 헌신적인 부인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짐에게 지금의 아내가 없었다면 어찌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소.*라고 하며 마황후의 친족들에게 봉록을 내리고자 했으나 마황후는 이를 거절했다.
잔인하고 냉혹한 정치를 펼쳤던 명태조 주원장은 자그마한 실수나 잘못에도 목을 가차없이 잘랐고 그에 연루되어 죽는 사람 또한 부지기수였다. 이런 잔혹함은 조정대신들뿐 아니라 후궁 비빈도 마찬가지였다. 혹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가차없이 죽임을 당했으며 명태조가 죽을때는 자신의 모든 후궁을 함께 순장할 것을 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바쳤던 마황후에 대해서는 늘 존경하고 감격해 했으며 마황후의 건의에 대해서는 참답게 들어주고 그대로 이행했다.
대신들은 일단 신변에 위험이 닥치면 마황후를 찾아가 울면서 하소연하였다. 이때면 마황후는 의례 주원장을 찾아 용서를 해주도록 사정하고 마음을 풀어주곤 했다.
마황후는 이처럼 너그럽고 인자하며 현명한 여인이었다. 황후가 된 후에도 주원장의 식사는 꼭 손수 차렸는데 이는 아내로서의 책임을 하는 것과 혹 주원장의 트집으로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을가 염려해서였다.
또, 중국에서 설명절에 대문에 福자를 붙이게 된 유래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주원장이 평복을 하고 시찰을 나갔는데 한 집 대문에 발이 커다란 여자가 수박을 안고 말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마황후는 회서(淮西)출신에, 어려서 집이 가난해 전족을 못한 관계로 발이 컸다. 그래서 수박을 안았다는 것은 곧 회서(怀西)요, 게다가 발까지 크니 이는 마황후를 빗댄 것이 아닌가. 주원장은 그 집 대문간에 `福'자를 붙여 표시한 후 사람을 파견해 그 집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한다. 이를 알게 된 마황후는 얼른 사람을 파견하여 동네 집집마다 `福'자를 붙이게 하라고 시켰는데 공교롭게도 한 집에서 글씨를 몰라 그만 거꾸로 붙이게 되었다.
자객들이 돌아와서 이 사실을 고하자 주원장은 `福'자를 거꾸로 붙인 집을 사살하라고 명한다. 이때 마황후가 "그 집은 황제의 사자가 올 것을 알고 거꾸로 붙인 것입니다. `福'자를 거꾸로 붙였으니, 복이 온다는 뜻이 아닙니까?'' 라고 말해 주원장은 비로소 화를 풀게 된다.
이처럼 마황후는 덕과 지혜를 겸비한, 중국 사상 가장 인자한 국모 중 한명으로 꼽힌다.
마황후는 51세에 병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병으로 앓으면서도 혹 의사가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는 죄를 문책 받아 목숨을 잃을 것을 우려해 끝까지 약 먹기를 거부했다. 마황후가 죽은 후 명태조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그 후로 더는 황후를 책봉하지 않았다. 그만큼 명태조의 마음속에 마황후는 다른 어떠한 여인도 대체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주원장은 죽은 후 마황후와 합장되었다.
▷박해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