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는 허베이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과 인접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후루다오시(葫蘆島市) 쑤이중현(綏中縣)에서 연이어 발견되고 있는 고대 왕궁은 실체가 무엇일까?
발해만 북쪽 연안을 따라 그 존재가 속속 보고되고 있는 이들 유적지를 중국 학계에서는 진시황제 혹은 한무제의 행궁지(行宮址), 아니면 '진한유지'(秦漢遺址. 진-한나라 시대 유적지)라고 규정한다.
행궁지란 제왕이 지방 출장 때와 같은 한정된 시기에만 거주하는 이동식 왕궁이자 황제의 별장으로 '행재소'(行在所)라 하기도 한다.
한데 쑤이중현 일대에 대한 발굴에서 나타난 진한시대에 속하는 유적들을 단순히 그렇게 간주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무엇보다 행궁지 숫자가 너무 많다. 나아가 그 규모가 행궁지 수준을 뛰어넘는다. 이에 더해 이들 소위 '행궁지'끼리 유적 밀집도가 높다.
이런 점에서 쑤이중현 만가진(萬家鎭)이란 구역이 주목을 요한다.
이곳에서는 갈석궁지(碣石宮址)라고도 하는 석비지(石碑址) 유적을 중심으로 그 서쪽 2㎞ 지점에 흑산두(黑山頭) 유적이라는 또 다른 대규모 왕궁터가 발견됐다. 나아가 갈석궁지 동쪽 1㎞ 지점에서도 또다른 진한시대에 활용된 건물터가 나타났다.
뿐만 아니다. 갈석궁지 북쪽 500m 가량 떨어진 양가둔(楊家屯)이란 곳에서는 같은 시대 건물지와 함께 기와 가마터가 확인됐고, 여기에서 서북쪽 3㎞ 지점 주가둔(周家屯)과 그 서쪽 2㎞ 지점 대금사둔(大金絲屯)에서도 진한시대 유적이 발견됐다.
만가진 지역 뿐만 아니다. 여기에서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40㎞ 가량을 간 지점인 허베이성 베이다이허(北戴河) 금산취(金山嘴)란 곳에서도 단순히 행궁터라고 보기는 힘든 규모와 출토유물을 자랑하는 진한시대 대형 건물지가 확인됐다.
이들 모두를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잠시 활용한 행궁지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은 재위 37년 동안 단 한 번만 이 지역을 찾았을 뿐이며, 황제 자리에 무려 53년 동안이나 있었던 한무제 또한 고작 1번 정도만 이 일대를 방문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
나아가 사기에 기록된 시황제와 한무제의 발해만 북쪽 해안 일대 방문 장소가 지금의 베이다이허나 만가진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 다만, 여기에서 가까운 그 어딘가에 그들이 한번씩 찾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설혹 두 황제가 방문한 곳이 지금의 베이다이허 일대라고 해도, 지금까지 확인된 유적지들을 행궁지로 볼 수 있는가는 커다란 의혹을 낳는다.
황제의 단 한 번 방문을 위해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것과 같은 화려하고 광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그것도 밀집한 지역에다 6곳 이상이나 지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만가진 일대 소위 '진한시대 행궁지' 유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고학에 대한 조예가 어느 정도 있다면,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출현하는 대형 건물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행궁지가 아니라 고대도시로서 한 왕국의 수도인 왕경(王京)인 것이다.
진한시대에 해당하는 기간에 발해만 북부 연안 일대에 왕경을 조성할 수 있던 주체는 누구일까?
중국의 각종 기록에서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 도읍지라는 왕험성(王險城. 혹은 왕검성<王儉城>), 나아가 이곳을 중심으로 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의 중심지가 있던 장소로 언급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역 일대라는 것이 우연이기만 할까?
나아가 최근 이 만가진 북쪽 100㎞ 지점에서 한사군 중 하나인 '임둔(臨屯)'이란 글자를 새긴 봉니(封泥. 문서를 봉하던 진흙 도장)가 출토된 것도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