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ㆍ산업 협력시대] 옛 대우종기 회생시켜 우량 기계업체로..채권단 결단이 한 몫
'10년만에 100배 성장'
꿈 같은 구호가 아니다. 실제로 두산인프라코어(19,650원 100 +0.5%)(옛 대우종합기계)가 중국에서 달성한 경영성과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지난 10년간 중국에서 급성장하면서 일본 고마쓰와 미국 캐터필러 등 유수의 업체들을 제치고 굴착기 부문 1위에 올랐다.
지난 2005년 한 해동안 두산인프라코어가 중국에서 굴착기로만 벌어들인 돈은 27억 위안(약 327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 기업도 몇년전까지는 외환위기로 무너져 내린 옛 대우그룹의 부실 계열사 중 하나였다. 부실 회사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건 2000년 말부터다.
◇산업銀, '총체적 부실' 수술감행= 외환위기 이후 대우종합기계의 전신인 대우중공업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부실을 안게 됐다. 부채비율은 900%에 달하고, 경상손실이 5700억원에 이르는 등 경영이 극도로 악화됐다.
해외 바이어들은 더 이상 대우 브랜드를 믿지 않았다. 계약은 잇따라 취소됐다. 1999년 8월, 회사측이 워크아웃을 신청한 것은 스스로 회생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 이듬해 10월, 산업은행과 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은 대우중공업에 대한 대수술을 감행한다. 대우중공업에서 대우조선과 대우종합기계를 분리해낸 것. 그러나 시장의 평가는 극명히 엇갈렸다.
분리 직후 재상장된 두 기업 중 조선은 상한가를, 종합기계는 하한가를 기록해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증권가는 대우종합기계가 더 이상 채산성을 맞출 수 없는 영업환경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상황은 암울했다.
◇신속한 출자전환, 대외 신인도 유지=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해외에서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며 "우선 자본잠식을 해소할 수 있는 빠른 출자전환이 절박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한 채권단은 고심을 거듭했다. 우선 부채가 너무 많았다. 또 중장비 산업의 전망도 밝은 편은 아니었다. 오직 임직원들의 회생의지와 수출계획만을 믿고 출자전환을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산업은행은 대우종합기계가 내놓은 과감한 구조조정 계획과 사업구조 개편의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해 12월까지 채권단은 대우종합기계의 1조353억원 차입금을 신속하게 출자전환했다. 자본잠식 상태가 해소됐다.
당초 채권단은 액면가 수준의 출자전환을 고려했다. 하지만 재무구조를 보다 건실하게 하기 위해 담보채권은 액면가로, 무담보채권은 할증 전환했다. 채권단 관계자는 "대외신뢰도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며 "최대한 기업의 입장에서 전환방식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부채 족쇄 풀어주자 "승승장구"= 대우종합기계는 채권단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점으로 대우자동차 등 관계회사 채권에 대해 충당금을 설정할 수 있게 돼 약 2500억원의 손실을 처리했다. 이후 대우종합기계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빅딜과 저수익 부문의 분사를 통해 사업구조를 대폭 조정한 조치가 효과를 발휘하면서 경쟁력이 높아졌다. 중국발 중장비 특수가 이어지며 매출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금융과 산업이 뜻을 모으자 부실회사는 건실한 굴뚝제조업으로 거듭났다. 채권단은 2001년 11월30일, 워크아웃 종료를 결정했다. 출자전환 1년 만에 우등졸업생이 탄생한 것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채권단은 이 날 서면결의를 통해 "대우종합기계가 2001년 1∼9월까지 매출액 1조1673억원과 당기순익 1044억원을 달성, 회사를 자체적으로 경영할 수 있을 것"이라며 워크아웃 졸업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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