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일본. 아버지는 시골에 살면서도 큰 도회지 서점에서 책을 주문하는 장서가였다.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은 서재에서 다카이 란잔(高井蘭山)이 번역한 세 권짜리 책을 발견했다. ‘수호전(水湖傳)…?’ 별 생각 없이 책을 펼쳤던 소년은 점점 그 속으로 빠져들어 마침내 108명 영웅들의 이름을 다 외울 수 있게 됐다. 아마도 소년이 훗날 중국 송대(宋代)를 연구하고 동양사학의 대가(大家)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스스로 이 책에서 고백하고 있다.
좀 거칠게 비유하자면,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1901~1995)가 ‘수호전’에 대한 책을 쓴다는 것은 아놀드 토인비가 ‘반지의 제왕’에 대해 책을 쓰는 것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수호전’을 통해 송대 정치·사회사의 심장을 곧바로 파고든다. 그저 허구의 이야기로 여겨지던 ‘수호전’은 송나라 때의 문헌들을 섭렵해 볼 수록 의외로 당시의 1차사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많은 실존 인물들에 대한 묘사도 정확했고, 사회상과 생활양식에 대한 묘사가 생동감이 넘치는 훌륭한 역사학 텍스트였다.
그렇다면 수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수호지’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 허구일까? 우선 소설의 주인공인 양산박 두목 ‘송강(宋江)’은 실존인물이었을까? 그렇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고증을 통해 놀랍게도 반란을 일으킨 ‘도적 송강’과 소설 뒷부분에 나오는 방랍(方臘)의 난을 토벌한 ‘장군 송강’이 두 명의 다른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도적 송강’은 관군과의 전투에서 싸움다운 싸움 한번 제대로 못 해본 채 무너져 버렸다.
나머지 ‘107 영웅’들은 모두 다 가공인물이다. 그렇다고 그냥 허구가 아니라 근거가 있는 인물 설정이다. 단편적인 설화들이 조합돼 만들어진 노지심과 이규는 사실 의협심과 무예를 통해 울분을 풀어버리려는 민중의 소망이 함축돼 만들어진 캐릭터고, 하루에 300㎞를 달릴 수 있었다는 신행태보 대종은 좀 더 빠른 운송수단의 출현을 바랐던 서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양산박’은 실제로 존재했다. 황하의 물길이 수백 년 동안 바뀐 탓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곳은 소설처럼 반체제 비밀결사의 본부였다. 인신공양이나 식인 풍습 같은 소설 속의 잔혹한 묘사도, 부패한 관리들의 횡포와 수탈도 모두 사실이었다. 공식 기록이 외면하고 싶었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들이 그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미야자키는 ‘수호전’에 반영된 이런 처절한 현실이 자신이 속한 교토(京都) 학파가 송나라 시대를 ‘중국의 르네상스 시대’로 본 것과 다르지 않느냐는 비판이 있을까봐 지레 이렇게 말한다. “앞서가는 이상과 뒤쳐지는 현실의 공존이 바로 르네상스의 특징이 아닌가?” 결국 ‘수호전’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민중의 유구한 소망이 삽입된 역사의 모습인 셈이다. 이 책을 미리 읽고 ‘수호전’을 읽으면 재미 없을 것이라는 걱정 이전에, 서점에서 변변한 완역본 한 질 찾기 어려운 우리 현실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