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학교에서 나는 가끔 혼자 있는 느낌이야.”
“언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다들 영어로만 말할 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심심해서 다른 걸 하다가 혼났어.”
아이의 목소리는 나지막하지만 분명했다. 낯선 언어 속에서 아이는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자 애썼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지만, 종종 다른 사람들의 기대와 기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가기도 한다.
어릴 적, 부모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아이를 세상의 중심이 아닌 그 너머로 바라보게 된다. 아이 또한 자신이 없을 때, 그 불안과 두려움을 부모에게 투영한다. 그렇게 부모는 세상의 위협을 알려주고, 아이는 부모의 반대나 조언을 핑계 삼아 스스로를 멈추곤 한다.
외국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더욱 부모의 기대 속에서 살기 쉽다. 부모는 대부분 고학력자로 현실적인 답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들의 말은 아이에게 합리적이고 지혜롭게 들린다. 아이는 자신을 믿기보다는 안전하게 기대를 따르고 싶다.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을 보면, 그들이 주도성을 보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농구나 그림, 음악 등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지만, 공부는 점차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이 되어버린다. 공부에 있어서 아이는 ‘기대에 부응하는 존재’가 된다. 자발적으로 하려 했던 일이 누군가의 지시로 변하면 그만두고 싶어진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활동이든 자신만의 의미를 갖고, 그 일을 통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이 되어야 좋다.
이때 ‘나는 할 수 없다’, ‘재능이 없다’는 믿음은 심대한 장애물이 된다. 이러한 믿음은 종종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잘할 수 없다고 믿게 된 경험을 다시금 살펴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이는 내가 그 일을 해야만 멋있어질 수 있다는 종속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내가 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싶은지,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엄마, 오늘 농장 다녀왔는데, 내 식물은 잘 못 자랄 것 같아.”
“왜 그럴 것 같았어?”
“몰라, 그냥… 그럴 것 같았어.”
“그럼 잘 자라는 식물은 왜 잘 자랄 것 같아?”
“흙이 이렇게 떠 있지 않고, 딱 붙어있어야 할 것 같았어.”
“너가 심은 건 흙이 막 이렇게 떠있었어?”
“아니 (웃음)”
“그럼 잘 자라겠네.”
“응, 이제 잘 자랄 것 같아.”
아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나는 잘 못하는 사람 이야‘ 라는 믿음을 한 차례 방어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자책할 때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가 불분명할 때가 많다. 자신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다.
뮤약사(pharmtend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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